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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Oct 18. 2021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며

외교부 ‘국민외교팀’에 일할 때 국제기구에 진출한 한국인을 초청해 국제기구에서의 경험을 나누는 행사를 가진 적이 있다. 강연이 끝나갈 무렵 강사는 ‘국제기구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국제기구에 근무하며 가장 힘들었던 경험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내가 목격했던 인종차별? 이런 이야기를 할까?


뜻밖에 그녀는 할머니의 임종을 가장 힘든 경험으로 꼽았다. 할머니와 특별한 관계였다는 그는 사랑하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오지에서 소식을 전해 듣고 힘들어했던 그때가 국제기구에 일하며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슬픈 소식을 듣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오지에 있어 쉽게 왔다 갔다 하지 못하는 국제기구 직원들에게는 특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이다.


정찰(Patrol)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팀 사이트(Teamsite) 작전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는데 프랑스 출신 래티시아 소령의 낯선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웬만한 남자보다 짧은 머리를 한 래티시아는 늘 당당하고 강인한 장교의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 그녀가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쓴 채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래티시아, 무슨 일 있어?”


“아버지가 편찮으시대.”


그녀는 선글라스 속에 감췄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가 서부 사하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병환을 발견했는데 위험한 곳에 있는 래티시아가 걱정할까 봐 가족들이 일부러 비밀로 해왔던 것이었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데... 괜찮아. 다행히 지금 고통스러워하시지는 않는대.”


“아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안타까워.”


조용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 위로했다. 옆에 있던 아르헨티나 출신 디에고 소령도 다가와 함께 위로했다.


“고마워. 괜찮아.”


“우리가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해.

우선 당장 프랑스에 가야겠네? 짐을 싸고 있어. 행정 처리는 내가 해볼게.”


제일 급한 건 팀 사이트에서 임무단 본부로 이동하는 항공편이었다. UN 항공편은 늦어도 탑승 2일 전까지는 신청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임무단 본부에서 항공연락장교(Air Liaison Officer)로 근무하고 있던 한국군 선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바로 다음날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부탁했다.


휴가를 가기 위해서는 휴가 신청부터 숙박 신청까지 챙겨야 할 서류가 많았다. 경황이 없을 그녀를 위해 내가 대신 서류를 준비하기로 했다. 하필 그날따라 장거리 정찰이 많아 서류에 승인 서명을 해야 할 사람이 한 명도 없. 하는 수 없이 ‘대행(Acting)’ 표시를 하고 내가 승인 서명을 했다.


서류 작업을 끝내고 본부에 모든 서류를 보내고 나니 이제는 프랑스행 항공권이 문제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래티시아의 신용카드 결제가 계속 거부되는 것이었다. 내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래티시아, 우선 내 카드를 써. 나중에 프랑스에서 돌아오면 그때 돌려주면 되잖아.”


래티시아는 차마 그럴 수 없다며 제의를 거절했다. 남자 친구의 신용카드로 항공권을 구입한 그녀는 다음날 UN 항공편을 통해 프랑스로 떠났다.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우리가 알아서 할게.”


래티시아는 그렇게 아버지가 떠나는 길을 배웅해드릴 수 있었다.




그녀가 아버지 곁 지키는 동안 나도 휴가를 떠났고 한 달 만에야 그녀를 만났다. 내가 휴가를 마치고 팀 사이트로 돌아오던 날, 래티시아는 밝은 표정으로 나를 옹했다.


얼마 뒤 열린 내 환송 파티에 래티시아가 술 한 병을 가져왔다.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 그녀는 보통 파티 초반에 잠깐 있다가 숙소로 돌아가곤 했는데, 그날은 늦게까지 파티에 남아 있었다. 떠나는 사람에게 한 마디씩 하는 순서가 돌아오자 그녀가 말했다.


“진, 정말 고마웠어. 특히 힘든 일 있었을 때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


울컥하는 그녀의 감정이 느껴졌다.



“고맙긴. 나한테 그런 일이 생겼어도 똑같이 해줬을 거잖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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