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렉시테리언 Mar 08. 2022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2018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연달아 열리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이 한반도에 쏠렸다. 나 역시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갖고 남과 북 그리고 북한과 미국의 회담을 지켜봤다. 국제학을 전공하고 관련된 길을 가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UN 평화유지활동(Peacekeeping Operation, PKO)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서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세계 6위의 군사력’이나 '세계 10위의 국내 총생산(GDP)'과 같은 경제규모를 생각하면, 한국이 국제 PKO에 참여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겠지만, 어떤 이들(특히 외국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남과 북의 상황’ 때문이다. ‘북한이라는 거대한 위협이 있는데, 다른 나라 분쟁에 신경 쓸 여유가 있나?’라는 것이다.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의 팀 사이트(Teamsite)들은 각각 담당하고 있는 지역 내 모로코 또는 폴리사리오(POLISARIO) 군 지휘관과 매달 ‘연락 회의(Liaison Meeting)’를 갖는다. 내가 두 번째로 배치된 팀 사이트는 총 3개의 모로코군 예하 지역대(Sub Sector)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각 지역대마다 한 번씩, 한 달에 총 3번의 연락 회의를 갖게 되어 있었다. 작전 장교였던 나는 다른 옵서버에 비해 이 연락 회의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연락 회의라는 것이 모로코 지휘관 입장에선 그다지 달가운 회의는 아니었다. 말이 좋아 연락 회의지, 우리 정찰팀(Patrol Team)이 모로코군의 ‘협정 위반 사례’나 ‘위반 의심 사례’를 지적하면, 모로코군 지휘관이 해명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항공 정찰(Air Patrol)을 마치고 헬리콥터에서 내리는데, 지상에서 항공기 이착륙을 지원하던 항공 통제 장교(Air Terminal Officer)가 말했다.


“방금 지나가던 무인 항공기(Unmanned Aerial Vehicle, UAV) 봤어?”


“아니? 못 봤는데. 무인기가 있었어? 사진 촬영했어?”


“아니. 너무 빨리 지나가기도 했고, 카메라가 없었어.”


카메라를 챙길 의무가 없는 항공 통제 장교를 나무랄 순 없지만 못내 아쉬웠다. 협정 위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부 사하라 상공을 비행하는 모든 군용(Military) 항공기는 UN 임무단의 승인을 받거나, 긴급 후송(Casualty Evacuation, CASEVAC)과 같이 예외적인 경우에도 반드시 미리 임무단에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무인 항공기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우리 팀 사이트는 사전에 통보받은 게 전혀 없었다.


서부 사하라 대부분이 사막 지역에 기반시설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미확인 무인 항공기’를 민간용 항공기보다는 군용으로 의심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무인 항공기가 전무한 폴리사리오와 달리, 모로코군은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도 나올 정도로 무인 항공기 운영이 이미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군용 무인 항공기가 맞다면 모로코 군 소속일 가능성이 컸다. 다음 연락 회의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휘관님, 최근에 ○○○○ 지역에서 UAV가 목격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 게 있습니까?”


“UAV? UAV가 무엇이죠?”


“무인 항공기입니다. ○○○○ 지역에서 목격되었다면, 아무래도 모로코군 소속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서요.”


“글쎄요. 나는 육군이라 잘 모르겠네요. 우리 모로코군에 무인 항공기가 있나요?”


모로코군이 무인 항공기를 운영한다는 사실이 이미 인터넷에 나와 있는데도, 지휘관은 ‘육군 출신인 자신은 모른다.’라는 식으로 발뺌을 했다. 갑자기 지휘관의 영어 실력도 안 좋아졌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잘 나눴는데.


연락 회의는 이렇게 우리가 질문이나 지적을 하면 모로코군 지휘관이 회피하거나 “처리 중이다.” “그것은 위반 사항이 아니다.”라는 식의 공방전을 펼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모로코군 지휘관의 계급은 한국군에는 존재하지 않는 ‘Colonel Major’라는 계급이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우리의 준장(원 스타★)이나 대령과 준장 사이 수준의 계급이었다.


솔직히 그런 고위 장교 입장에선 ‘UN군 완장’을 찬 대위나 소령 나부랭이가 따지듯이 쏟아내는 질문이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지휘관은 다른 분쟁지역 UN PKO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UN군 선배'였다.

모로코군 지휘관은 나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어 퓨 굿 맨" 중에서/출처: 다음 영화)


그러던 중 모로코군 지휘관이 나에게 반격할 기회가 왔다. 당시는 북한이 한창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던 때였는데, 하필 연락 회의 며칠 전 북한이 또 무력 도발을 한 것이다. 내가 연락회의에 나타나자, 모로코군 지휘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띠며 내게 말했다.


“오~ 한 대위, 한국 괜찮은 건가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 북한이 미사일 쏘고 난리인데, 한국 군인이 얼른 귀국해야지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나?’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선 나와 정찰팀의 공세 기회를 차단하는 동시에, “너희 나라나 지키지, 왜 남의 나라에 와서 간섭이냐?”라는 식으로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속내가 빤히 보이지만 나는 국방부 입장문 수준의 답변으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역시나 계획에도 없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러갔고, 확인해야 할 내용을 다 물어보지도 못한 채 회의가 끝나고 말았다. 모로코군 지휘관의 작전이 통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질문을 모로코군 지휘관에게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동료 옵서버들 그리고 여행하면서 만난 많은 외국 친구들도 북한의 무력 도발이 있을 때마다 “괜찮나?”라며 물어보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매번 우리 정부 공식 입장을 반복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인도 출신 방송인이 자신의 친구에게 한국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TV 뉴스에는 인도하면 ‘파키스탄과의 분쟁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나오잖아. 한국도 비슷해.”


해외에서 K-Pop, 영화와 드라마 같은 한국 문화가 인기를 끌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지긴 했지만, 아직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니다. 그래서 북한의 도발이 있을 때마다 여전히 “괜찮나?”라고 물어보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실제 PKO 활동 중인 외국 군인들이 물어볼 정도면 말 다 한 것 아닐까? (오히려 PKO 활동 중인 군인들이라 관심을 갖는 걸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과 무력 도발이 한국 PKO 활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꼴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2018년 일련의 회담에 거는 기대가 컸다. 실제로 북한 핵을 폐기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 수만 있다면,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널리 널리 퍼뜨려서 세계 평화 정착에 기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순진무구한 마음에서.



지금은 기회가 다시 멀어진 것 같지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이전 25화 피카소와 평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