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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Mar 17. 2022

UN에서 ‘친구’의 의미

국방대학교 평화유지센터(PKO Center)에서 ‘파병 전 교육’을 받을 때, UN 고위직 여성분이 강연을 온 적이 있다. 강연에 앞서 자기소개를 하던 그녀는 우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캐서린(Catherine)이라고 합니다. 제 성을 부르지 말고 그냥 ‘캐서린’이라고 불러주세요.

UN에서는 모두가 성을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릅니다.”


고위직에 나이도 꽤 있으신 분인데 무조건 이름을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UN의 원칙이라고 했다.


UN의 원칙이라 그런지 이 원칙은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에서도 비슷하게 지켜졌다. 단, 우리는 계급이 있는 군인이니 조금은 어색하지만 우리만의 방식으로 바꿔 사용했다. 계급을 아예 안 부를 수는 없고, 뒤에 성이 아닌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었다.


내 계급과 이름(대위 한 진)을 예로 들면, 대위 계급인 Captain을 앞에 두고 뒤에 성 “Han”이 아니라, 이름 “Jin”을 붙여 “Captain Ji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옵서버(Observer)들도 똑같았다. 처음 왔을 때 성과 이름이 헷갈리거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이런 식으로 불렀다.

MINURSO 친구들. "CAPT Jin", "CAPT JOHN" 이런 식으로 '계급'+'이름'을 불렀다. (그나저나 저 때 젊었네....)


또 다른 호칭도 있다. 바로 ‘친구’다. UN에서는 모두가 ‘친구’다. 처음 보는 사람도 “내 친구(My friend)”고 지나가는 사람도 “내 친구(My friend)”라 부른다. 물론 같은 팀의 사람도 이름 대신 “내 친구(My friend)”라고 부를 수 있다.


이 호칭이 어떻게 널리 쓰이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이 표현은 중동이나 서남아시아 쪽에서 많이 쓰이는 것 같기는 한데, 아마도 다양한 출신 배경으로 이뤄진 집단에서 누군가 쓰기 시작하고, 친근감과 존중을 표현하기에 호불호가 없는 표현이라 계속 쓰인 게 아닐까 싶다.




“내 친구” UN ‘친구’와도 때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UN의 ‘친구’들도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각자만의 이유와 목적으로 그곳에 왔고, 지금까지 서로 살아온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부딪히기도 하고 갈등도 생기는 것이다.


MINURSO 현장에서 갈등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뉘는 것 같다.


(예시로 설명을 하려는 것뿐이지, 특정 문화나 종교, 지역이나 국가를 비난/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미리 밝힌다.)


첫 번째는 ‘문화 차이’다.


팀 사이트(Teamsite)에는 두어 대의 공용 냉장고만 있고, 개인 냉장고가 거의 없어서 소시지 같은 가공육이나 맥주 같은 개인 기호식품을 공용 냉장고에 보관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슬람권에선 돼지고기와 술이 금기시되다 보니, 모두가 사용하는 냉장고에 술과 돼지고기를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을 줄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개인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대화와 양보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능력’의 문제다.


모두들 장교 출신이지만, 개인마다 혹은 나라마다 능력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MINURSO는 다른 임무단과 달리 사막 지형의 어려움 때문에 운전 능력도 꽤 중요한데, 자국에서 운전 경험이 적거나 수동변속 SUV 차량 운전이 능숙하지 않은 옵서버들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차량을 무리하게 조작하는 경우가 있다. 그 외에도 영어가 부족하거나, 기본적인 컴퓨터 사용 능력이 부족한 옵서버도 있다.

정찰 중에 차가 모래에 빠지면 꽤 힘들다. 사진 속 차량은 뒤축도 많이 틀어져 있다. (운전자/사진: 플렉시테리언)

이것도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칠 수 있거나 의지가 있는 친구들은 어떻게든 도와주고 능력을 끌어올리고, 그렇게 했는데도 특정 분야에 약한 옵서버가 있으면 약한 업무에서 제외하고, 잘할 수 있는 업무를 맡기면 되는 일이다.


마지막 세 번째 갈등의 원인은 바로 ‘개인 성향(성격 차이)’ 때문이다.


이건 종교, 문화, 능력과 같은 배경에 관계없이 순전히 개인의 성향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갈등의 주된 원인이 되곤 했다. 역시나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팀 사이트에서는 종종 파티가 열리는데, 파티마다 각자의 역할을 나눈다. (누구는 고기를 굽고, 누구는 테이블을 세팅하고, 누구는 불을 붙이고 등). 한 번은 내가 역할을 나눴는데, '고기 굽기'를 맡은 친구가 파티 직전에 나를 찾아왔다. (어떤 팀 사이트는 파티 준비를 현지인에게 모두 맡기는 곳도 있다.)


“나 오늘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날이야. 그래서 요리 안 해.”


“아.. 그래? 알았어. 그럼 내가 구울게.”


파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터라 그냥 내가 하기로 했다.(나는 사실 육식을 하지 않는데!) 다음날 다른 친구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왔고, 이유를 설명하자 그 친구가 말했다.


“그냥 하기 싫었던 거야. 파티 끝나고 그 친구 남은 음식 잔뜩 챙겨 갔어.”


한 번은 오후 늦게 정찰(Patrol)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팀 사이트 정문이 안에서부터 잠겨 있었다. 원래는 정찰팀이 무전으로 도착 예정 시간을 알려주면, 당직 장교가 정문을 열어두도록 되어 있었다. 당직 장교에게 다시 무전을 해 정문을 열고, “왜 정문을 열어두지 않았냐?”라고 묻자 당직 장교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건 내 일 아닌데.”


당직 장교 업무 목록(Checklist)에 나와 있는 기본적인 일인데, 나 몰라라 한 것이다.

옆에 함께 있던 동료가 말했다.


“게을러서 그래. 네가 참아.”




여러 나라 사람이 모인 곳에서 자칫하면 인종차별이나 특정 국가 또는 지역 비하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모두들 조심하긴 한다. 설사 뒤에서 구시렁거리거나 욕을 하더라도, 공개적으로(특히 첫 번째나 두 번째 이유로) 화를 내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성격 차이나 개인 성향 때문에 다투는 일은 생기기도 한다.


환경 탓도 있다.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날씨와 울퉁불퉁한 사막 길을 매일같이 차량을 이끌고 다니다 보면 육체적으로 부치는 것이다. 거기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Compound)에 몇 달씩 갇혀 지내다 보면 스트레스도 쌓이고 쉽게 예민해진다.


나도 처음에는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냥 내가 조금 더 고생하면 되지.’라는 생각이었는데, 때로는 참기 어려운 때가 있었다. 힘들고 예민해진 것이다. 결국 친구들과 몇 번 다투게 되었다.


이럴 때, 상황이 심각해지는 것을 막고 관계를 회복할 때 유용한 게 ‘친구’다.


한 번은 다른 친구와 대판 말싸움을 벌였는데, 팀 사이트 지휘관이 무슨 일인지 묻다가 말했다.


“그래도 둘이 친구지?(But, you are still friends. right?)”


“그렇지...”


결국 서로 “내 친구”라 부르고 맥주 한 잔 하면서 금세 화해했다.


사실, 아무리 대판 싸워도 계속 붙어 있어야 하는 사람이고, ‘위험에 처했을 때 동료(친구) 손에 목숨까지 맡겨야 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작은 다툼이 이런 관계를 무너트리지는 못한다.


가족이 다퉜다고 가족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UN 본부에서 근무해보지는 않았지만, 직급과 나이에 관계없이 무조건 ‘이름’을 부르는 것도 UN 현장 임무단과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모두가 평등하고, 나의 등을 너에게 맡기고, 넓게 보면 우리는 가족이다.’라는 의미?


UN에서 ‘친구’란 그런 의미인 것 같다. 물론 각자 해석은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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