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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Apr 02. 2022

지독한 외로움과 뜨겁게 식은 맥주

“그러면 너무 외롭지 않아?”


코로나19 유행 이후 항상 재택근무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친구가 물었다.


“괜찮아. 워낙 지독한 외로움에 익숙해서.”




한국 학생이 달랑 2명 있는 미국 유학생활에도 "Out of Nowhere"의 끝판왕인 서부 사하라 사막에서도 늘 지독한 외로움 속에 살았다. 물론 사하라 사막에서는 동료들과 24시간 함께 있었지만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외로움은 피할 수 없었다.


자다가 갑자기 깰 때도 있고 잠이 오지 않을 때도 많았다. 매력에 흠뻑 빠진 모카 포트의 부작용일 수도 있지만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막의 밤은 생각보다 쌀쌀하다. 낮에는 섭씨 50도씨에 육박하지만 밤에는 18도 정도까지 떨어진다.


‘18 도면 선선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모래 폭풍(Sandstorm)’ 이 더해지면 겉옷은 무조건 챙겨야 한다.


잠이 안 오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SNS를 하기 위해 사무실로 향한다. SNS에 무언가를 게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다. 상상 이상으로 느린 인터넷 속도 때문에 시간은 금세 간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의 SNS 게시물을 하나씩 기웃거리다 보면 잠이 다시 올 때도 있다. 그렇게 한동안 새벽에 SNS 기웃거리는 게 일상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잠이 오지 않으면 모래 폭풍 속에 담배 한 대를 꺼내 문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친구 따라 겉멋으로 피우다 군대에서 끊었지만, 사막에서 조금이나마 외로움을 덜어주는 존재였기에 사하라 사막에선 가끔씩 피우곤 했다. 컴컴한 하늘 수없이 빛나는 별과 달 아래 담배 한 대 피우면 절로 잠이 오곤 했다.

"거 담배 한 대하기 딱 좋은 밤이구만."




사막 생활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른 아침 차량으로 사막을 달리던 순간을 꼽는다. 평평한 사막을 달리면 모래 바람이 바닥을 쓸고 지나가는데, 이 모래 바람이 떠오르는 태양을 만나면 무대 연막(Smoke) 효과처럼 마치 ‘은하수’나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이 모래 바람은 결코 내 말과 글 솜씨로 표현할 수 없고,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황홀함을 안겨준다.


(붙일 수 있는 사진이 없는 게 너무 안타깝다....)


정찰팀에는 정찰 리더(Patrol Leader), 부 리더(2nd in charge), 운전 담당(Driver)과 같은 역할을 돌아가면서 맡게 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역할은 ‘부 리더 겸 2호차 운전 담당(2IC and Driver)’이었다. 팀 사이트(Teamsite)에 사람이 부족하면 3명으로 구성된 정찰팀이 나가는데, 세 번째 사람이 2호차를 운전하는 동시에 부 리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담배를 즐길 줄 아는 2IC and Driver가 ‘모래 은하수’를 만나면 담배 한 대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원칙적으로 UN 차량에선 금연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일탈이었다. 더욱이 사막에 오기 직전 이별한 나에게 스피커에서 슬픈 발라드마저 나온다면 물리칠 수 없는 당연한 순리였다.


글을 쓰다 보니 저 순간이 서부 사하라 생활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라니, 어쩌면 나는 사막에서의 외로움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침부터 화창한 날씨에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오랜만의 출장에 준비해야 할 것도 있고 근처의 쇼핑센터로 향했다. 화창한 날씨와 사람들의 밝은 표정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문득 여행 다닐 때처럼 길바닥에 앉아 맥주 한 캔이 마시고 싶어졌다. 무작정 맥주 한 캔을 사 들고 쇼핑센터 앞 광장으로 나왔다.



“길에서? 맥주 온도는 어떻게 유지해?”


“빨리 마시면 되지. 그리고 나 사막에서 뜨거운 맥주에 익숙하잖아.”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 SNS에 올린 맥주 사진을 본 친구가 말했다.


문득 그 ‘뜨겁게 식은 맥주' 덕에 사막에서의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유난히 심심하게 (어쩌면 외롭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다. 사막 생활 중 제일 친하고 의지했던 헝가리 출신 벨라(Bela)에게 말했다.


“벨라, 나 심심한 것 같아. (Bela, I think I am bored.)”


“그래? 가자!”


“뭐하려고?”


“군인이 심심하면 뭐 해? 술 마셔야지! (What do soldiers do when they are bored? We drink!)”


그렇게 바비큐 장(Barbeque Area)에서 대낮부터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벌써 시작한 거야?”


벨라만큼이나 친한 브라질 출신 카를로스(Carlos)가 맥주를 들고 합류했다. 그렇게 지나가던 동료 하나둘씩 모여 모래 바람이 부는 밤늦게까지 뜨겁게 식은 맥주를 부딪쳤다.


모든 옵서버(Observer)가 술을 살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UN에서 나오는 수당은 똑같지만, 각자 나라에서 받는 월급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UN 면세품이라고 해도 한국과 별반 차이 없는 맥주 가격은 개발도상국 출신 옵서버들에게 분명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컴컴한 밤, 모래 바람을 피해 컨테이너와 컨테이너 사이에 자리를 펴고 ‘뜨겁게 식은 맥주’를 즐기고 있는데, 평소 말수가 적고 소심한 아프리카 국가 출신 데비(Davi)가 우리를 지나갔다.


“데비, 어디가? 맥주 한 캔 해.”


“아.... 나 맥주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우리 것 마셔. 얼른 와.”


맥주 한 캔을 따서 데비에게 건넸다. 데비는 밝은 표정으로 우리의 즉흥 모임에 함께했다. 그날 밤 어느 때보다 밝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데비를 볼 수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이 나만의 것이었을까?


결국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건 옆에 있는 친구다. 그런 친구에게 ‘뜨겁게 식은 맥주’ 한 캔이 뭐가 아깝다고. 우리 모두 외로운데.




맥주 한 캔과 귀에서 나오는 한국 음악에 나도 모르게 몸이 들썩인다.

화창한 날씨에 광장에서 혼자 즐기던 '뜨겁게 식은 맥주' 한 캔이 나를 다시 서부 사하라로 데려다 놓는다.


그렇게 가장 화려했지만 동시에 가장 지독한 외로움을 안겨준 사막 생활을 함께 해준 친구들을 생각하며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 시간을 함께 해준 친구들에게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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