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출신에 인내심 약한 내가 그나마 해 온 유일한 취미가 달리기다. 그마저도 요즘의 러닝기준으론, 어디 내세우기 초라한 "런린이 (러닝+어린이)" 수준이지만.
어느 주말 아침, 안양천을 뛰는 데 누군가 빠르게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워낙 잘 뛰는 분들이 많다 보니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나를 앞질러 갈 때 보니 초등학교 4학년 조카보다도 어려 보이는 어린이였다.
마침 안양천 달리기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가족 전체가 함께 달리는 ‘패밀리 런 (Family Run)’에 참가하는 아이인 듯했다. 아버지와 큰 딸, 꼬맹이 아들 둘이 함께 뛰어가는 데, 어찌나 안정적이고 속도감 있게 뛰어가는지, 그날 패밀리 런 부문 1등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달리기를 십수 년을 해 왔는데, 어린아이한테 지다니? 나는 정말 런린이가 맞구나...’
친구들은 “초등학생은 못 이긴다.” 라며 위로해 줬지만, 지난 세월 내 달리기가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나의 관심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SNS는 그날도 달리기와 관련된 콘텐츠 여럿을 띄워 주었다. 그중 “달리기는 매우 위험한 운동”이라는 주제의 콘텐츠를 보게 되었는데, 요지는 이랬다.
“달리기는 부상을 당하기 매우 쉬운 운동이라,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특히 헬스를 오래 한 사람들은 더 강하게, 세게만 달리려는 경향이 있는데, 달리기는 그렇게 하면 쉽게 다치게 된다. 하루 세게 달렸으면, 충분히 쉬고 다음날은 천천히 달려야 한다.”
“‘앞에 뛰어가는 저 사람을 반드시 따라잡고 만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뛰면, 달리기 실력은 금방 늘 거야.”
우리만의 ‘사하라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존(John)이 해 준 말이다.
* 아래 글 링크
런린이인 내겐 드문 일이지만, 달리기를 할 때 누군가를 추월하면 기분이 좋기도 하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우쭐함 같은 걸까? 그런데 저 영상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뒤처져 온다고 해서 나보다 느리거나 멀리 가지 못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는 그냥 쉬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내일의 장거리를 위해 천천히 가는 것일 수도 있다.'
요즘 직장 생활이 정체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정체라기보다 뒤처진다는 느낌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한두 달 사이 회사에 많은 일이 있었고, 크고 빠른 변화에 내가 적응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그 와중에 몇몇 동료는 승진을 했다.
내 승진 이야기가 나온 지 벌써 2년이 되었거늘, 내겐 이렇다 할 소식은 없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는 것만 같다.
그래서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상사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회사의 큰 변화를 겪고 한 달 정도 쉰 적이 있다'라며, 내가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잠시 쉬어가기로 한 첫날, 아침 일찍 일어나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조금 더 멀리 뛰어 보았다.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패스트푸드 점에 들러 아침 메뉴도 하나 사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출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저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금 느리게 뛴다고 해서 빨리 뛰지 못하거나 멀리 갈 수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런린이일수록 조금 빠르게 뛰었다면 충분히 쉬어줄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인생도,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 잠시 쉬어간다는 게 반드시 뒤처졌다는 게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조금 뒤처졌다 한 들 어떠랴. 잠시 쉬었다가 다시 가면 되지.
집에 돌아와 상사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쉬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마워. 잘 쉬고 잘 회복해서 돌아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