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렉시테리언 Oct 14. 2021

“눈에 고민이 보였어.”

“하프 마라톤 대회를 준비해 보려고.”


“사막에서 마라톤을? 굳이 왜?”


“재미있잖아. 할 것도 없고. 같이 할 거지?”


브라질 출신 카를로스 대위가 갑자기 마라톤 대회를 제안했다. 당시에 나는 마라톤 경험이 전혀 없었다. 군대 체력 검정 기준에 맞춰 3Km나 5Km 정도 뛰는 것은 익숙했지만 마라톤에 도전할 정도의 체력은 아니었다.


“글쎄. 생각해 볼게.”


카를로스는 몇 주 동안 홀로 마라톤 대회 준비를 했다. GPS 장비를 들고 팀 사이트(Teamsite) 주변을 물색하던 그는 활주로를 크게 한 바퀴 돌면 5Km가 조금 넘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활주로를 4바퀴 도는 마라톤 코스를 완성했다.


나와 다르게 옵서버(Observer)들은 마라톤 대회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다들 이런 이국적인 곳에서의 마라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매일 5Km에서 10Km씩 뛰며 대회를 준비하는 이들도 생겼다.


팀 사이트 수준의 행사로 준비하던 대회가 한순간에 커질 뻔하기도 했다. 마라톤 소식을 들은 사령관(Force Commander)이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다른 팀 사이트의 참여를 독려한 것이다. 거기에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대회가 끝날 때까지 인근 팀 사이트에 헬리콥터 대기를 지시했다.


“이 정도를 원한 게 아닌데....” 마라톤을 준비한 카를로스와 우리 팀 사이트 모두 당황했지만, 다행히 사령관의 메시지는 대회를 얼마 안 남긴 시점에 전달됐고 참가를 신청하는 옵서버는 없었다.




대망의 마라톤 대회 날이 밝았다. 사실 ‘날이 밝았다’라는 표현과는 달리 모두들 해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해가 중천일 때 마라톤을 했다가는 참가자 모두가 헬리콥터에 실려 갈 판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4시 반 즈음 마라톤 대회를 시작했다. 21.1km에 도전할 자신이 없던 나는 일단 활주로 2바퀴를 뛰는 10Km 코스에 도전하기로 했다.


출발 신호와 함께 아시아, 유럽, 남미 출신 군인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10Km도 가끔 뛰던 나는 선두 그룹을 천천히 따라가며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UN 서부 사하라 임무단(MINURSO)에서 가장 건장하기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존(John) 대위가 폭주 기관차처럼 치고 나갔다.


뛰지 않는 옵서버들도 대회를 도왔다. 누군가는 구급함과 아이스박스(Cooler)에 물, 주스 등을 담아 작전 차량으로 뒤따라 왔고, 우리 팀 사이트 최고령 50대 옵서버는 대회 참가자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내가 7Km 정도 달리고 있을 때 존이 한 바퀴를 따라잡으며 나를 앞질렀다. 마치 영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 주인공이 “왼쪽으로 지나간다.(On Your Left)”라는 말로 팰컨에게 좌절감을 안겨 준 것처럼 존은 나에게 멋지게 윙크를 날리고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활주로 2바퀴를 뛰고 처음에 목표한 10Km에 도착했다. 보통 7km 정도 뛰면 무릎 통증이 심해서 장거리 달리기를 잘 못하는데 그날은 10Km를 뛰었는데도 무릎 상태가 괜찮았다. 계속 뛰어보기로 했다.


12Km 정도를 통과했을 때 무릎 통증이 시작됐다. 존은 이미 결승선을 통과했고 다른 참가자들도 하나 둘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3바퀴를 거의 다 뛰었을 무렵 무릎 통증이 극에 달했다.


‘역시 준비 안 된 마라톤은 무리구나. 여기까지인가 보네.’


그 순간 갑자기 사진을 찍어주던 옵서버가 운동화를 갈아 신고 팀 사이트 정문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가 15Km를 통과하자 그가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같이 뛰어 줄게.”


“아녜요. 아녜요. 그럴 필요 없어요.”


“괜찮아. 같이 뜁시다.

아 그리고 나는 코스를 모르니까 안내 잘해줘야 해.”


한사코 거부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심지어 “코스를 모른다.”라며 내가 빠져나갈 퇴로마저 차단해 버렸다. 하는 수없이 다리를 질질 끌며 마지막 바퀴에 들어섰다. 이제 17Km 정도 뛰었을까? 더 이상 무릎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른 참가자들은 이미 전부 결승선을 통과한 뒤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뛰는 대신 걷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사실 아까 15Km에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길도 모르는데 굳이 같이 뛰자고 해서 지금 뛰고 있는 거예요.”


“알아. 네 눈에 그 고민이 보였어.(I saw that in your eyes.)

근데 거기에서 멈추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같이 뛰자고 한 거야.”


뉘엿뉘엿 지던 해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며 마지막 5Km를 조금씩 전진해갔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전에도 많은 대화를 가졌지만, 이번처럼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마지막 2Km 정도 남았을 때 모든 이들이 밖에 나와 우리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UN 차량 한 대가 전조등을 켠 채 우리를 따라오며 길을 밝혔고, 이미 대회를 끝낸 참가자와 구경 나온 폴리사리오(Polisario)도 우리의 마지막 바퀴를 응원하고 있었다. 거의 끝에 다다랐다.


“마지막은 뛰어서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이제는 여러 대가 된 UN 차량의 호위와 경적 응원을 받으며 우리는 결승선을 통과했다. 팀 사이트 정문에서 기다리던 옵서버들이 일제히 내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최고령 동료는 마지막까지 내가 돋보일 수 있게 했다. 결승선을 통과할 때 일부러 멀리 떨어져 나만 주목받을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최종 기록 2시간 56분. 도착 시간 19시 36분.




누군가 “잘 뛰는 아마추어는 그 시간에 풀코스도 완주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초라한 기록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혼자라면 해내지 못했을, 동료들이 다 같이 만들어 준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 아직까지 마라톤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풀코스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럴 용기를 주는 동료가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제대하고 마지막 5Km를 함께해 준 그를 찾아갔다.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이었는데, 긴 여행에 지쳐있던 내게 선뜻 자신의 집을 내주었다. 그렇게 그의 비엔나 집에 한 달가량 머무르며 함께 추억을 돌아보고 다시 여행할 에너지를 모았다.


당시 그는 우크라이나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다시 분쟁 감시 임무를 맡아 떠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그와의 연락이 끊겼다. 출장으로 비엔나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와 이메일로 연락을 해봤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사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를 서운하게 한 것 같다.



지금쯤이면 그도 아마 은퇴를 해 비엔나에 머무르고 있을 것 같다. 내가 비엔나에 있을 때 그는 아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싶다며 ‘각’이 너무나 멋진 랜드로버 차량 한 대를 구입했었다.



‘지금은 어디에 있나요?

흙먼지 날리며 아들과 함께 사하라 사막을 멋지게 달리고 있나요?

그때 고마웠어요.’




이전 20화 사하라 119 : 민간인 후송 작전(CASEVAC)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