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키우면 안 되는 사람이 강아지를 키우며 하는 생각
사실 저는 강아지를 키워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저는 강아지를 슬픔 없이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나와 강아지 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미로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도 미로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 끊임없이 미로와의 이별을 생각하는 제가 한심해서였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강아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강아지라는 존재 앞에서는 더욱 속수무책이 됩니다.
저의 은사님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에 어린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제자에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지 물어봅니다. 제자는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가 생각한다고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조금 놀라시며 그러면 언제 죽음에 대해 생각하냐며 일주일에 하루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로 정해놓은 날이 있냐고 농담을 던집니다. 그리고 자신은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고 합니다.
딱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 대답에 저 역시 적잖이 놀랐습니다. 저는 선생님처럼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게 더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과 강아지는 그다지 좋은 조합이 아닙니다. 강아지가 제 삶에 들어온 것은 죽음에 대한 저의 막연한 생각이 또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 생각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아파합니다. 이 생각은 미로가 주는 행복과 늘 힘겨루기를 합니다. 어느 날은 이쪽이, 어떤 날은 저쪽이 이길 뿐 둘은 항상 함께입니다.
SNS에서 팔로우하는 강아지 계정이 있었는데, 얼마 전 강아지가 갑자기 떠나버렸습니다. 건강한 어린 강아지였기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강아지의 보호자는 하늘나라에 도착해 구름 사이 문 앞에 서 있는 강아지의 그림으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는 강아지였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강아지가 떠난 빈 집으로 돌아온 보호자의 마음이 어떨지는 감히 상상해 볼 수도 없습니다. 미로처럼 겁이 많았던 그 작은 강아지가 마지막에 무섭지는 않았을지 저로써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미로와 나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떨지 그려보는 무의미한 일이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의 눈앞에 닥친 슬픔에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함부로 얹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숨을 크게 내쉬어 보았지만, 그 모든 게 하나로 엉겨 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보 같긴 하지만, 미로와 함께 살게 된 이상 저는 이렇게 한심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든 미로 곁에 누워 따끈한 미로의 발을 만지며 나중에 나는 이 순간을 얼마나 그리워할까 생각합니다. 이 감촉을 더 잘 기억해 두려고 눈을 꼭 감았다가 미로 얼굴이 보고 싶어 다시 눈을 뜨기를 반복합니다. 아직 네 살도 안 된 강아지를 붙들고 벌써부터 이 모양이니 큰일입니다.
미로는 저의 이런 어리광을 마냥 받아주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됐다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앞발을 빼내고 고개를 돌려 다시 자리를 잡습니다.
앞으로 닥쳐 올 일들에 미로는 틀림없이 저보다 더 늠름하게 대처할 것입니다. 강아지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를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강아지의 의연함에 슬쩍 기대어 용기를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우중충한 삶의 태도에 미로는 늘 관대하니 참 다행입니다.
이렇게 두 겁쟁이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