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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Mar 06. 2022

흰 매화

 오늘 아침 매화꽃이 폈다. 엊그제만 해도 또르르 구르다 만 물방울처럼 가지에 매달려 간을 보던 녀석들이다.

     

  평 남짓 화단에 오래된 동백, 예닐곱 살 청매, 네 살배기 홍로 사과나무 각 한 그루씩 있었다. 부족한 듯해서 삼 년 전에 석류, 백매(白梅) 한 그루씩 묘목을 심어 식구가 모두 다섯으로 불어났다. 어린 매화가 어느 정도 크면 청매의 한 가지를 잘라 답답함을 트게 할 것이다. 혹 서로 연분이 닿으면 연리지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백매가 올해 처음 핀 것은 아니다. 작년에 첫 꽃을 피우더니 매실 서너 개 맛보기로 내게 건네기도 했다. 땅을 딛고 선 줄기가 제법 토실토실하다. 열 손가락으로 셀만큼 핀 꽃들. 어느 수필가는 말했.

돌아앉아 옷 벗는 여인네처럼 꽃은 그렇게 다소곳이 피어난다.”

     

 우리 집 백매는 성숙한 여자보다 개구쟁이다. 밤새 성냥개비로 불장난하다가 가지마다 화염(花焰)으로 남겨놓는다. 대금 청공을 덮는 갈대청처럼 얇은 꽃 잎 조각 다섯. 쌀쌀한 아침 기운 맞아 이미 새하얗고 꽃밥 머리에 인 수술들은 속절없이 떨고만 있다.  

 옛말에 매화는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 하였으니 잎을 다시 오므릴 수야 있겠는가. 등 떠밀려 핀 죄 밖에 없다고 남 탓하랴. 뒤따라야 할 꽃 몽우리들이 미적대는 것이 얄미울 따름이다.

     

 청매는 양지바른 옆집에 기댄 채 게으른 꽃 서너 개 피워놓고, 나머지 가지에서의 개화는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터줏대감 동백도 품었던 동박새 두 마리 풀어놓으며 맹랑한 어린 매화를 놀려댄다.

     

 매화꽃 내음에 마음 오롯이 모으니 빛바랜 지난날들이 소환된다. 외갓집에 찾아온 엄마가 내게 안아보자 손 벌릴 때 풍기던 것이 이랬고, 삼천포 선착장에서 내 목에 매어주던 그림 선생님의 스카프 냄새 또한 이랬다.

 붉은 꽃받침에 순백의 꽃잎들은 방학 때 만난 어느 여학생의 모습이었으니, 두근대던 가슴에 내 얼굴은 꽃 몽우리처럼 물들기도 했. 내게도 그런 날들이 엄연히 실존했었다.

     

 매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퇴계선생이다. 매화 시만 백여 수를 넘는다 하지 않던가. 오죽했으면 타계하던 날 매화분에 물주라고까지 했었으니.

     

 매화 향기 그윽한 것들은 귀로 들어야 제격이라고 한다. 향을 코로 맡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귀로 듣는 다는 것.

 도산서당 달밤에 매화를 읊은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를 조곤조곤히 음미해 보는 새하얀 아침이다.

                          

     

뜨락을 거닐자니 달이 사람 따라오는데

매화꽃 언저리를 몇 차례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깃에 향내 머물고 꽃 그림자 몸에 가득해라

     

步屧中庭月趁人

梅邊行遶幾回巡

夜深坐久渾忘起

香滿衣巾影滿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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