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성화 Apr 07. 2024

월 천 찍히는 통장

2021년

일천억 원 수표가 금전운을 불러온다고?

천억이라니... 얼마만 한 크기인지 감도 안 오는데

부적인가?




  “상호 좀 생각해 봐.”

  니트 가공 일을 하는 남편이 사업자를 새로 낸다며 은근히 닦달했다. 작가이니 뭔가 참신한 문구를 생각해 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 사실 수필 제목 하나 정하는데도 한나절이 걸리고, 그렇게 고민해서 지은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허다한데, 남의 편 취향에 맞춘 상호를 짓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래 묵은 부부 대부분이 그러하듯 우리도 그저 같이 사는 내 딸 엄마, 내 아들 아빠일 뿐, 취향이라고 비슷한 부분 하나가 없다. 그러니 내 맘에 들어 내놓는 상호가 그의 맘에 들 리 만무하다. 


  10여 년 전 처음 사업자를 낼 때는 역술원에 가서 30만 원 주고 상호를 지었는데, 5년 만에 쪽박 차고 엎었으니 다시 역술원에 갈 생각은 없다. 그러면서도 인터넷 작명 철학원이 검색에 걸리니 또 보게 되는 것은 역술인이 영 사이비는 아니라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까…….     


  스물여덟 살, 하라는 결혼은 안 하고 드라마 교육원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뇌경색이 발병한 지 10년이 훌쩍 넘어 결국 운신하기도 힘들어졌고, 엄마는 궁여지책으로 사주 보는 법을 배우러 다닌 지 3~4년쯤 되던 때다. 그때 사주를 가르쳐 주던 여자 역술가는 우리 집 형편을 알고 엄마한테 무료로 역술을 가르쳐 주는 대신 가사 도우미 일을 해 달라고 해서 엄마는 매일 그 집으로 출근했다. 그이는 엄마보다 딸이 배워야 돈을 잘 벌 수 있다며 나를 데리고 오란 말을 자주 했다. 엄마는 장○○ 역술가가 실력 있는 사람이라 일본, 미국 등에서 매년 전화로 사주를 보고 돈을 부쳐 주기도 할 정도라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이 얘기를 했다. 그러고는 그냥 가 보기만이라도 하자고 졸라 댔다.

  집안에 환자가 있고, 더군다나 그 환자가 가장이니 우리 집은 늘 돈이 궁했다. 여상 졸업 후 바로 직업을 가져 집안 경제를 책임질 거라 기대했던 딸이 어설프게 대학을 간 것도 모자라 드라마작가가 된다고 그나마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웠으니 엄마로서 답답하긴 했을 거다. 급기야 엄마는 역술인이 되면 직장인이 아니니 아르바이트할 때처럼 짬짬이 글도 쓸 수 있을 거라고 꼬드겼다.

  “알았으니까, 그냥 한번 가 보기만 하는 거야.”

  다짐하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4.19 민주 묘지를 지나 북한산 초입, 엄마가 다니던 약수터 가는 길 옆 골목 주택가였다. ‘장○○ 운명 철학’이라는 간판만 아니면 단아한 단독주택,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들어가서 만난 역술인은 엄마보다 나이는 적었지만, 자식들이 장성한 중년 여성이었다.

  그이는 나를 앉혀 놓고 바로 사주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날 운명을 타고났는지부터 시작해서 성격은 물론이고 몸에 있는 작은 흉터까지 모두 잡아냈다. 대단하구나 싶어서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고는 자신의 통장을 꺼내 보여 줬다. 자세한 명세를 살피지는 못했지만, 출금액을 제외하고도 월수입이 1000만 원 정도 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타고난 능력을 잘 활용하면 그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나더러 역술가가 되라고 했다. 돈 욕심에 눈이 번쩍 뜨여 홀딱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눈을 반짝이는 내게 그 여자는 네 사주로는 작가가 될 수 없다고 얘기했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작가가 되는 것은 아주 나중 일이 될 테고, 그나마도 무척 어렵게 될 거란다. 역술을 배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 글 쓰는 일을 집어치우고 매달려야 된다며 다시 통장을 들이댔다. 드라마 쓰기에 한참 빠져 있으면서도 재능이 없는 건 아닌지 고민하던 내 머리를 하얗게 만드는 말이었다. 1000만 원짜리 통장은 머릿속에서 날아가고 계속해서 “작가가 될 수 없다.”라는 말만 내리 꽂혔다. 그 뒤로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 집을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집까지 20여 분, 걸어오는 내내 쉬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집에 와서는 방에 틀어박혀 통곡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그렇게 많이 울었던 건 그때 한 번, 엄마 돌아가셨을 때 한 번, 두 번뿐이다. 그토록 원하던 꿈을 절대 이루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짓는 말을 들으니, 앞으로의 삶은 전혀 의미가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 친구처럼 의지하던 딸의 낯선 모습에 엄마는 많이 놀랐는지, 다시는 뭘 하라 말라하지 않을 테니 네 뜻대로 하라며 물러났다. 


  “네가 풀이한 운명은 잘해 봐야 실제 운명의 70% 정도이며 그 또한 모두 이야기하지 말고 30%만 해야 한다.” 엄마가 보던 운명 철학책 제일 앞 장에 있던 글귀다. 함부로 속단하지 말라는 경고다. 장 역술가는 70%를 모두 얘기해도 내가 따르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더 강하게 말해서 나를 제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30%만 얘기했다면 오히려 내가 따르지 않았을까. 지천명을 바라보는 이제야 드는 생각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말대로 됐다. 역술인이 되는 길을 거절한 나는 무척 힘든 생활을 했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다음에야 드라마작가가 아닌 수필가가 되었다. 통장 잔액이 1000만 원은커녕 1000원도 안 될 때가 많았지만, 역술가가 되지 않은 것을 후회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때 꿈을 접고 역술 공부를 했다면 항상 넉넉한 통장 잔액을 보면서도 허전하고 허탈하지 않았을까? 운명을 바꾸어 2~3년 만에 드라마작가가 되어 떵떵거렸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적어도 내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만족한다.


  안톤 체호프는 『신참 작가들을 위한 지침서』에서 “작가가 되려는 열망은 불치병이다. 모든 수단 방법을 다하여 작가라는 직업을 스스로 피하라.”라고 했다. 나는 반대로 모든 수단 방법을 다하여 작가라는 직업만을 향해 돌진했으니, 이제라도 안톤 체호프의 나머지 지침이나마 잘 따라 봐야 하려나 싶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띠에게 좋은 가게 이름’이 검색에 걸렸다. 남편은 쥐띠다. 남동생 이름을 빌려 ‘니트 패션 해누리’로 사업자를 내고 2년 남짓 일하다가 남편 명의로 일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바꾸려는 거였다. 인터넷 작명 철학원에서는 쥐띠는 첫음절은 ‘ㄴㄷㄹㅌ’ 중 하나에 두 번째도 ‘ㄴㄷㄹㅌ’ 중 하나로, 혹은 첫 번째 음절은 ‘ㅇㅎ’ 중 하나에 두 번째 음절은 ‘ㄴㄷㄹㅌ’ 중 하나로 가게명을 지으라는 등의 조언을 했다.

1박 2일을 꼬박 고민하면서도 작명원의 조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가 내놓은 사업장명은 ‘나래 니트’와 ‘니트 어필’ 두 개였다. 이번에는 날개 달고 날아오르라고 ‘나래 니트’, 실력으로 어디서든 제대로 어필해 보라고 ‘니트 어필’, 남편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사업장 주소가 그대로여서 상호를 바꾸긴 해야 할 터라 고민하던 그의 선택은 ‘해누리’였다. 어쨌든 바꾸긴 바꾼 거고, 거래처들은 늘 ‘해누리’로 불렀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간단하다는 이유였다. 괜히 헛고생시키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고까웠지만, 자신의 사업장이니 자기 마음에 드는 게 제일 중요한 데다 월 1000만 원으로도 못 바꾸는 마음을 공짜로 바꾸라 할 수 없지 하고 말았다.

  요즘 같아선 월 1000만 원이라면 분명 혹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은데, 역술원 근처는 가지 말아야겠다. 그저 남편 스스로 지은 사업장명에 돈복이 깃들길 바랄 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