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시간이 계속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배려했다. 수컷 토끼는 조그만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불안해하는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평화롭고 감미로운 나날이었다.
수컷 토끼는 성실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공동체 일에도 헌신적이어서 모든 토끼가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물론 나도 그런 그가 좋았다. 수컷 토끼는 가족이 먹을 풀 뜯기에, 공동체 일에 점점 바빠졌다.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수컷 토끼와의 애정도 예전 같지 않아졌다. 신혼이 지났으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려 했지만, 정체 모를 불안감이 머릿속을 스치곤 했다.
“수컷 토끼야. 나 요즘 기분이 이상해. 산 풍경이 그리워. 그리고 이곳 풀은 맛이 없어…….”
풀 죽은 목소리로 하소연하는 나를 수컷 토끼는 등을 핥아주며 말했다.
“이방토끼야. 내일은 조금 멀리 나가 보자. 그곳의 풀은 산에서 먹었던 것하고 같은 맛이 날지도 모르잖아.”
수컷 토끼의 다정한 말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산에서 먹었던 것과 같은 맛의 풀을 찾을 수 없었다. 밤마다 산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맛있는 토끼풀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나 신기하고 반가웠지만, 나는 꿈속에서조차 그 토끼풀을 입에 넣어 보지 못했다. 꿈을 깨고 난 아침에는 허망함에 식욕도 기력도 다 사라지고 말았다. 가끔은 호랑이 굴에서 먹었던 날고기 생각까지 났다.
나는 수컷 토끼에게 호랑이 굴에서 자란 내 비밀을 털어놓기로 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수컷 토끼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현재의 이방토끼야. 네 과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좋은 일만 생각하자.”
역시 수컷 토끼는 이해심이 넘쳤다. 하지만 내 투정이 매일같이 계속되자 수컷 토끼도 더 이상 상냥하게 위로해 주지 않게 되었다.
“나 요즘 바쁜 거 알잖아. 날고기가 먹고 싶으면 스스로 구해서 먹도록 해. 난 네가 날고기 먹는 걸 막고 싶지는 않아.”
서운했다. 무뚝뚝하게 말하는 수컷 토끼는 옛날 다정하던 그 토끼가 아니었다. 나는 수컷 토끼가 돌아올 시간을 기다렸다가 그날 있었던 사소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난 원래 말주변이 없잖아. 그리고 특별한 일도 없었어.” 하며 무심한 표정으로 풀을 먹기만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잠이 들었고, 다음날은 또 일찍 일어나 공동체 일을 하러 나갔다.
수컷 토끼도 나도 귀를 축 늘어뜨리고 슬퍼하는 날이 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