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샨티 Sep 29. 2024

꿈같은 나날

 꽃이 피는 봄이 오면 우리는 매일같이 꽃놀이를 했다. 수컷 토끼는 이른 봄에 피는 제비꽃을 좋아했다. 그는 보라색 제비꽃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쌉싸름한 맛이 나는 이파리를 먹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분홍색 벚꽃이 참 좋았다. 달빛 사이로 흩날리는 벚꽃잎을 바라보면 황홀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꽃으로 가득한 세상은 아름다웠고, 젊은 우리는 꽃보다 아름다웠다.


 여름은 천국이었다. 어디를 가나 풀이 무성해서 먹이 걱정은 내려놓고 마음껏 먹고 놀았다. 우리는 토끼풀을 엮어 만든 화관을 쓰고 놀다가 자고, 자다가 일어나서 또 뛰어놀기만 하면 되었다. 천국을 상상하려 눈을 감을 필요도 없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이,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는 천국이었다.


 가을은 일 년 중 가장 바빴다. 풀이 귀해질 겨울에 대비해서 우리는 풀을 뜯어서 말려야 했다. 땀을 흘리며 풀을 뜯는 수컷 토끼를 위해 나는 큰 나뭇잎으로 도시락을 만들었다. 나뭇잎 도시락에 초록 토끼풀을 담고, 이빨로 갉아서 만든 당근 하트를 얹었다.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며 나뭇잎 도시락을 연 수컷 토끼의 눈에 빨간 하트가 새겨졌다. 수컷 토끼는 붉게 당근 물이 든 내 입술에 수줍게 입맞춤을 했다.          


 추운 겨울이 오면 들판에는 풀이 말라서 먹을 것이 귀했다. 우리는 가을에 만들어 둔 마른풀을 아껴 먹으며 하는 일 없이 굴 안에서 지냈다.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눈밭으로 나가 숨바꼭질을 했다. 털이 하얀 우리는 애써 나무 뒤로 숨을 것도 없었다. 빨간 눈알만 감추면 되는 싱거운 숨바꼭질이었지만, 우리는 깔깔대며 즐거워했다. 우리의 웃음 소리는 유리창에 내뱉은 입김처럼, 눈송이와 부딪쳐 별 모양의 결정을 만들었다. 들판에는 하얀 눈과 수많은 조각이 싸락싸락 쏟아져 내렸다. 수컷 토끼와 나는 황홀한 눈빛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이전 10화 큰잠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