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가장 영민한 성과
성별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중인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그간의 사회구조가 키워온 힘의 불균형의 실상은 이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고 자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과거에 더이상 붙들려 있지 않기 위해, 이제 우리는 본래의 잠재력을 일깨울 자극점을 찾아 나서야 할 때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IMF가 오기 직전,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시기, 하지만 희망의 거대한 구름도 채 가리지 못한 부분은 존재했다.
일명 상업고등학교(대학 진학이 아닌 취업을 목표로 한 고등학교, 이하 ‘상고’)를 나와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든 여성들, 그리고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대기업의 눈 가리고 아웅식의 횡포다.
삼진그룹이란 대기업에서 일하는 이자영(고아성)과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은 누구보다 출중한 실무능력을 자랑하나, 여성이고 대학이 아닌 상고를 나왔다는 이유로 입사 8년차가 되었는데도 승진은커녕 여전히 유니폼을 입은 채 사무실의 잡다한 일을 도맡고 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이들의 꿈은, 회사가 제시한 기준인 토익 600점을 넘겨 대리가 되는 것, ‘진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야기는 그녀들의 바람에 바로 화답한다. 물론 그녀들이 원한 모습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대리로 승진은커녕 유니폼도 여전히 입고 있는데 임무만 막중하게 떠안는다. 심지어 회사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져 잘못 했다가는 아예 유니폼을 벗어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까지 있다.
이들에게 주어진 ‘진짜 일’이란 게 바로, 정화시켜 내보내야 할 폐수를 ‘콸콸’ 배출하여 주변 지대를 오염시킨 회사의 비리를 캐내는 것, 즉, 삼진이란 대기업의 내부 고발자가 되는 것인 까닭이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참 얄궂게 느껴지겠다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작품 내에서 자영과 유나, 보람 외에 결말까지 믿고 맡길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까.
실제로 이 겁도 없는, 아니 겁이 안 날 리 있나, 삼진그룹의 일원이라는 자존감과 그로부터의 소명의식이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했을 뿐인 그녀들은, 각자 지닌 고유의 능력과 그간 쌓아온 실무경험을 최대치로 발휘하여 ‘진짜 일’을 제대로 완수하고 만다.
실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관심은 그녀들의 임무 완수에 있지 않다. 처음부터 그녀들의 승리를 예상이라도 한 듯,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완수되는 지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라는 틀에 갇혀 아득바득 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모습을 담아내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를 통해 우리는, 잊지 말았어야 하나 잊고 있었던 어떤 중요한 사고(思考) 하나를 되찾는 과정을 겪는다.
불평등한 시선이 없는 세계를 상상해 보는 것,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균형잡힌 사회구조 속에 존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큰 역량을 가지게 되었을지, 아니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유니폼도 가릴 수 없는 이 힘이 얼마나 클지, 생애 처음으로 가늠해보는 것이다.
아울러 본연의 힘을 자각한 이들의 연대는 또 얼마나 강력한가. 별 거 아니라면서 얼마간의 돈으로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살며시 덮으려는 대기업의 횡포를 저지했다.
우리가 힘 없고 뒷배경 없이 태어난 게 문제가 아니라, 받지 않아야 할 불공평한 대우를 구두를 닦아 오고 담배심부름을 하고 커피를 타는 등의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하나로 만들어버리고, 신이 우리 각자에게 쥐어준 잠재력을 제 맘대로 틀어막고 있는 비틀린 사회구조가 원흉이라는 깨달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맞짱 뜬 이들이 결국 IMF를 비롯한 여러 국가적 위기 속에서 우리의 오늘을 지켜내었다는 사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영민한 작업이 일으킨 가장 영민한 성과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