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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콤S Nov 08. 2021

오늘 수업은 '외상'

그런데 왜 나는 금박종이, 은박종이를 자르고 있지?

오늘 수업은 외상이다.

왜 외상이냐면 내가 그렇게 정했다.


우리나라 교육은 이렇다.

과목이 있으면 교과서가 있다.

교과서를 펼치고 진도대로 수업을 한다.

2009년에 시험적으로 전국의 모든 초중고 학교가

보건수업 연간 17차시를 의무로 시행한 뒤로,

보건도 교과서가 생겼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교과서 없이 수업을 한다.


교육청도, 우리 학교도 보건수업이 얼마나 중요하고,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가를 역설하지만,

교과서를 사주지 않았다.

그건 너의 게으름이 아니냐고 한다면 변명을 해야겠다.

사보려고 몇 번 교과서 담당자에게 요청했지만,

결국 한번도 성사되지 않아서

2009년 이후 단 한번도 보건수업을 쉬어본 적이 없지만

2009년 이후 단 한번도

교과서로 수업을 해본 적도 없다.

그리고 이제는 전자교과서

혹은 교과서가 없는 시대로 돌입 중이다.

그래서 교과서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보건수업을 함으로서 내가 수업을 한 만큼

다른 교과 선생님들, 혹은 부장님들이

시수를 줄일 수 있는데,

아마도 내 보건수업을 학교에서 꾸준히 지켜준 이유가

그것일 것 같아서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참으로 부정적 교사 같다.


교과서가 없는 대신

나는 내 나름대로

아이들과의 17시간을 알차게 운영할 수 있어서 기쁘다.

오늘은 외상 수업이다.

PPT는 이미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오전 내내

색종이를 한장한장 반듯하게 접어

4등분으로 자르느라 매우 바쁘다.


1학기에 수업을 하는 반은 5월,

2학기에 수업을 하는 반은 11월 수업 앞머리에

하트반지 접기를 한다.

그 재료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5월에는 어버이날, 스승의날 등

감사함을 전하는 날이 있고,

11월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빼빼로데이가 있다는 핑계로 종이접기를 한다.

상업적으로 이용되어

특정 회사의 부를 지켜주는 것은 불만이지만,

누군가에게 구체적으로 감사를 전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배우면 좋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에 하트반지를 접고,

특히 금종이 은종이를 많이 주고,

금종이는 더 많이 준다. 달라는 대로 준다.


어버이날 멘트는 이렇다.

엄마아빠한테 이 반지 딱 꽂아드리면서

나중에 커서 진짜 금으로 해드릴게요. 해봐라.

엄마아빠 표정이 어떻겠니?

그러면 아이들 얼굴이 먼저 환해진다.


보건수업에 전혀 관심이 없던 아이들도

이런 건 따라하는 편이다.

아이들이 이쁘게 따라오면,

나는 막 아껴두었던 진주 스티커, 큐빅 스티커도 내어준다.

아이들은 착하고, 부지런하다.

반지를 막 열개씩 스무개씩 접기도 하고,

수업을 마친 뒤 색종이가 없으면

A4를 잘라서 만들기도 한다.

스승의 날 같은 때는 여러 선생님들의 손에서

내가 준 종이로 만든 반지들이 보이면,

그렇게 보람찰 수가 없다.

정작 내 손은 비어있을 때도 많지만 말이다.

반지 세 개를 다만든 사람은 나와서

4가지맛 빼빼로를 하나씩 먹을 수 있다.

입맛만 버렸다고,

배고프다고 난리났다.


오늘은 외상 수업이다.

찰과상, 자상, 창상, 화상, 타박상, 열상 등등등을

배울 것이다.

나는 내상을 다스리는 종이접기를 한 다음,

외상 수업을 할 것이다.

내상도 외상도 우리는 보살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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