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한글을 떼고 가야 할까. `한글을 떼면 좋고 뭐 안 떼도 크게 지장이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했다면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놓고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초등학교에서도 물론 한글을 가르쳐준다. 초등학교 1학년은 연간 52시간의 한글 교육을 받는다. 그것도 의무적으로 말이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반드시 한글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지침 때문인지 아이도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가장 먼저 배운 것이 기역 니은 디귿 등의 자음과 아 야 어 여 등 모음이었다. 한글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방침 때문이다. 받아쓰기 시험도 없어지면서 부모와 아이의 부담감도 줄었다. 초등학교에서도 의무적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받아쓰기 시험까지 사라졌다면 한글을 좀 모르고 입학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무조건 한글을 떼야 한다. 그냥 100% 수준으로 떼고 가는 것이 낫다. 글자만 더듬더듬 읽는 수준을 넘어 어떤 글을 읽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서는 것이 좋다. 글자를 쓰는 것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50% 이상은 돼야 아이가 초등학교에 적응하기 수월하다.
왜 그럴까. 교과서의 모순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 정도 지나면 본격적으로 교과서를 갖고 수업을 하게 된다. 학습적인 부분은 크게 국어와 수학이다. 일단 국어 시간에는 앞서 말했듯이 기역, 니은, 디귿 등의 기초적인 한글 수업을 한다. 문제는 수학 시간이다. 국어 시간에 아이의 진도는 기역, 니은 수준인데 수학 시간엔 마치 아이가 한글을 다 안다는 전제 하에서 교육이 이뤄진다.
2015 교육과정이 `창의융합형 인재를 길러내자`고 바뀌면서 쉽게 말해 수학과 국어를 섞어놨다. 문장을 읽고 이를 이해해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 수학을 공부할 때 한글은 기본 옵션이다. 국어 시간에는 기역, 니은 등 한글의 자음, 모음을 배우지만 동시에 진행되는 수학 시간에는 `니들 한글 다 알지?`라는 전제하에 수업이 이뤄지는 것이다. 52시간의 한글 교육 시간을 갖지만 말 그대로 허울 뿐, 애초에 한글을 모르고선 다른 교과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을 떼지 않고 학교에 갔다면 아이는 그야말로 `멘붕`이 올 수 밖에 없다.
2018년에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 31번이 `창의융합`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정답률이 18.3%에 불과해 차라리 찍는 것이 낫다는 비난을 들었었다.
<17세기 후반에 뉴턴은 태양 중심설을 역학적으로 정당화하였다. 그는 만유인력 가설로부터 케플러의 행성 운동법칙들을 성공적으로 연역했다. 이때 가정된 만유인력은 두 질점이 서로 당기는 힘으로, 그 크기는 두 질점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지구를 포함하는 천체들이 밀도가 균질하거나 구 대칭을 이루는 구라면 천체가 그 천체 밖 어떤 질점을 당기는 만유인력은 그 천체를 잘게 나눈 부피 요소들 각각이 그 천체 밖 어떤 질점을 당기는 만유인력을 모두 더하여 구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지구보다 질량이 큰 태양과 지구가 서로 당기는 만유인력이 서로 같음을 증명할 수 있다. 뉴턴은 이 원리를 적용하여 달의 공전 궤도와 사과의 낙하 운동 등에 관한 실측값을 연역함으로써 만유인력의 실재를 입증하였다.>
여기까지가 31번 문제의 일부만 발췌한 것이다. 실제 문제는 지금부터다. [<보기>를 참고할 때 앞의 문장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이라고 돼 있다.
이쯤 되면 국어 문제인지, 물리 문제인지 알 수 없어진다. 지문도 너무 길다. 아직 끝이 아니다. 선택 문항 역시 길다.
밀도가 균질한 하나의 행성을 구성하는 동심의 구 껍질들이 같은 두께일 때 하나의 구 껍질이 태양을 당기는 만유인력은 그 구 껍질의 반지름이 클수록 커지겠군.
태양의 중심에 있는 질량이 m인 질점이 지구 전체를 당기는 만유인력은 지구의 중심에 있는 질량이 m인 질점이 태양 전체를 당기는 만유인력과 크기가 같겠군.
질량이 M인 지구와 질량이 m인 달은 둘의 중심 사이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으면서 질량이 M, m인 두 질점 사이의 만유인력과 동일한 크기의 힘으로 서로 당기겠군.
태양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피 요소와 지구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은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부피 요소들과 태양의 그 부피 요소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들을 모두 더하면 구해지겠군.
반지름이 R, 질량이 M인 지구와 지구 표면에서 높이 h에 중심이 있는 질량이 m인 구슬 사이의 만유인력은 R+h의 거리 만큼 떨어져 있으면서 질량이 M, m인 두 질점 사이의 만유인력과 크기가 같겠군.
답은 2번이다. 구 형태의 물체에서 일부 질량 m에 해당하는 구껍질의 만유인력은 하나의 질점, 즉 구의 중심간에 작용하는 것이지, 구 전체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의 일부 질량 m과 지구 전체 질량 M간의 만유인력 크기는 지구의 일부 질량 m과 태양의 전체 질량 M간 만유 인력의 크기와 다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지문과 보기를 통해 <부피 요소들은 하나의 구껍질을 이룬다. 구껍질들은 구를 이룬다. 각 부피요소는 하나의 질점으로 볼 수 있다. 각 부피요소는 질량을 갖고 `부피 x 밀도=질량`이란 공식에 따른다>는 점을 이해하고 외부의 질점 P를 당기는 특정 구껍질의 만유인력은 그 구껍질의 질량에 해당하는 질점이 그 구껍질의 중심 O에서 P를 당기는 만유인력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P를 당기는 모든 구껍질들의 만유입력의 총합은 구의 질량에 해당하는 질점이 구 중심 O에서 P를 당기는 만유인력도 같다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이 뿐 아니라 구의 형태를 갖는 물체의 질점은 구의 중심 O와 일치하며 따라서 중심 O를 기준으로 만유인력이 작용하는데 이때 두 물체 간 만유인력은 두 물체의 중심을 잇는 직선상의 반대방향으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유추해내거나 이미 알고 있어야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국어 영역에서 요구하는 이해력, 유추, 추리 등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만유인력을 총체적으로 이해했어야 정답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높은 수준에서 말이다.
이게 `창의융합`의 실체다. 융합이라고 했지만 그냥 교과목을 짬뽕한 수준이다. 문제는 이러한 교육과정은 한 번 바뀌면 단기간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창의융합형 인재가 길러지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공교육 체계에 들어온 이상 좋든 싫든 이런 환경에 빨리 적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낫다. 창의융합은 대학수학능력 시험 31번과 같은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교과나 문제집 등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다음 문장에서 틀린 곳을 찾아 밑줄을 긋고 바르게 고치세요.
<동생은 나보다 키가 더 낮습니다>
이 문제가 국어 영역에서 나왔을까. 수학에서 나왔을까.
수학 문제 중 하나다. `낮습니다`를 `작습니다`로 고쳐야 한다. 수리적 능력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맞춤법, 서술서의 쓰임 등을 묻고 있다. `창의융합`이란 거창한 말로 포장했지만 `수학 문제 풀 때 국어 문제 나오고 국어 문제 풀 때 수학 문제 나온다`에 불과하다. 모든 교과목이 연계돼 있으니 기본 도구인 한글을 모르고선 이해하기 어렵다.
선생님들도 아이들이 한글을 다 안다는 전제하에 가르친다. 기역, 니은, 디귿은 일종의 전시 교육, 전시 행정에 불과하다.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매일 책을 한 권씩 가져와 조용히 읽는 시간을 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글자를 모른다면 아이 혼자 얼마나 허공을 헤맬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한글을 다 안다는 전제하에 수업이 이뤄진다. 제대로 쓸 줄 몰라도 최소한 읽을 줄은 알아야 한다.
지인의 자녀는 한글을 완벽하게 숙지하지 않은 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선생님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아이는 70~80% 가량 한글을 떼고 갔다. 이 정도 수준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한글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는지 돌아가면서 교과서를 읽도록 했다. 그러나 아이는 충분히 읽을 줄 아는 글자가 있음에도 “선생님, 저는 이거 못해요”라고 했다고 한다. 아이는 한글을 100% 알아야 오롯이 책을 혼자 읽는다. 또 아이는 글자를 읽을 줄 알더라도 아직은 더듬더듬 읽는 수준이라서 자기가 못한다고 생각하면 또래 친구나 선생님 앞에서 읽지 않는다.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떼고 가는 것이 아이가 좀 더 수월하게 학교에 적응할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