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중학생일 때 나는 가끔 농담처럼 “공부에 미쳤군.” 하고 말했었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것이 바로 ‘중독’이었습니다.
아이는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책을 볼 때가 많았습니다. 시험기간도 아니고 급하게 제출해야 하는 숙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무엇엔가 쫓기듯 공부를 하더군요.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시 지루해지면 그 틈을 비집고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때로는 영화에 집중하는 것도 힘들어했습니다. 갑자기 읽다만 책을 다시 읽고 싶어 진다거나 못다 푼 문제가 머릿속에 맴돈답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큰아이가 하는 행동을 보고 뭔가 잘 못 된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웠습니다.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다른 모습에 당황스러웠습니다. 혹시 공부하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집안 분위기가 강압적인 것은 아닌지 고민도 했습니다.
한 번은 아이에게 “엄마 아빠가 공부 안 하면 혼낼 것 같니?” 하고 물어봤습니다.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더군요.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영어에 너드(Nerd)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모범생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공부에 빠져서 다른 것에는 관심 없는 사람 또는 약간 편집광적인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똑똑하지만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도 너드(Nerd)에 해당됩니다. 나는 큰딸이 공부에만 집착하는 편집광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공부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형제자매가 성품이나 재능이 같을 수 없지만 두 아이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작은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이유를 알고 보니 큰 아이의 공부 중독의 원인과 과정을 알겠더군요.
공부를 두려워하는 아이의 양상은 이렇습니다.
나는 큰아이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만큼 둘째에게도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캐나다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온 터라 한국어에 서툴렀고 한국 아이들만큼 수학을 잘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일을 하느라 아이를 돌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에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행복하게 보내더군요. 방과 후에는 마지못해 공부방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시험 성적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쿨한 엄마인척 하느라 “공부 못해도 괜찮아”를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 불안감을 감추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두 가지는 유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책 읽기와 영어입니다. 돌려 말하면 영어 책 읽기입니다.
캐나다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 또래 아이들보다 수준이 높은 책을 읽었던 아이입니다. 최소한 책 읽기를 통해서 영어만큼은 놓치지 않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책 읽는 것도 즐기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을 들였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시기를 놓친 것 같았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려니 능률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나도 서서히 포기하게 됐습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재능을 살려 진로를 미술 쪽으로 잡았습니다. 공부 능력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한국에서는 미술을 하려면 학원에 다녀야 하는데 그마저 흥미 없어했습니다. 몇 개월 다니다 그만둔 학원이 두세 곳쯤 될 때 그림 그리기도 중단했습니다.
중학생이 되니 공부는 밤 열두 시를 넘기면서 공부를 했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항상 피곤에 지쳐 잠들었다가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가기 싫은 학교를 가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삶이 얼마나 고단 했던지 날마다 조금씩 시들어가는 꽃잎처럼 보였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아이는 어딜 가나 이길 수 없는 상대들에 둘러싸여 패배자로 살았던 겁니다. 싸워 볼 마음조차 들지 않을 만큼 두려운 존재들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공부하는 법을 배웠다면 관성처럼 공부를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아무런 경각심 없이 편안하게 보냈더니 중학교 때는 벽이 너무 높게 느껴진 겁니다. 특히 수학은 최악이었습니다. 늦은 밤까지 매달려도 숙제도 마치기 어려울 지경이었기 때문에 몸은 항상 피곤했고 시험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제야 초등학교 때부터 다른 아이들처럼 쥐 잡듯이 공부를 시키지 않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유능하다는 학원을 뺑뺑이 돌리며 어떻게든 따라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아이를 더 힘들게 만든 것 같았습니다. 공부 습관을 잡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둘째 아이가 어느 것에도 열정이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걱정할지언정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향하는지 관심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집중력은 스마트폰 게임에 쏟아부었습니다. 온라인 게임에서만 항상 승자였습니다.
자매간에 사이가 좋았지만 성향이 너무 달랐습니다. “자매가 어쩜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며 천성이려니 했습니다. 강제로 공부를 시켰다면 성적이 올랐을지 모르지만 차이는 미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 하며 마음 편하게 포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