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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찾기 Jun 08. 2023

자식들 키우고 나니 부모님이 애가 되셨다

딸로 살기 어렵다

지난 주말, 여동생의 연락이 왔다. 답답한 마음에 카톡을 보내노라고. 엄마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길어질 수 있는 이야기라서 월요일에 만나 이야기를 했다.


동생 말로는 며칠 전, 아빠와 전화할 일이 있어 얘기하는데 엄마얘기를 꺼내시면서 큰 걱정을 하시더라는 거다.

엄마가 서랍장 옷 속에 넣어둔 작은 함이 사라졌는데, 아빠를 의심하셨다 한다. 한 시간을 쏘아 부치시는데, 속을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황당하고 억울해서 나왔노라고, ‘치매’가 오는 게 아니냐고, 딸들이 엄마랑 얘기 좀 해보라고


동생과 만난 다음날, 엄마와 동생과 셋이 점심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참이라 그날 엄마와 대화를 해 보기로 했다.

엄마와 만나서 솔직하게 물어봤다. 자초지종을.


일단 엄마가 옷정리를 하게 된 이유도 독특했다. 한 달 정도 전부터 등 쪽이 아프고 통증이  온몸으로 번져서, 필시 한 세 달 안에 죽을 ''이라고 판단하셨단다. 병원에서 진단받은 것도 아니고 혼자 판단하신 거다.


그리고는 당신 죽음을 대비해야겠다 싶어 어수선한 잡동사니를 먼저 버렸고, 당신 죽은 후 다 태워 버릴 게 아까운, 괜찮은 옷과 가방은 서울 이모에게 주었단다.

죽기 전에 주어야 사용할 수 있으니 미리 주었단다.( 내가 최근에 사드린 제법 비싼 옷과 막내가 생일 선물로 드린 지갑까지도! 정말 황당했다!) 

옷장정리 하는 와중에 액세서리함이 사라진 걸 발견했고 아빠를 다그쳤다고 한다.


엄마 표현으론

그게 발 달려 걸어 나갔을 리가 있냐?
집에 늬 아빠랑 나랑 둘이 사니
늬 아빠 짓이지

이러신다.


가져가는 순간을 보지 않는 이상,
함부로 사람을 의심하면 안 된다.
아내에게 의심받으면 얼마나 상처가 되겠냐.
아빠에게 뭐라 하셨길래
아빠가 그렇게 큰 걱정을 하시냐?

했더니


 어~ 이제 내 보석함까지 손대는구먼

이라고 했단다. 어떤 표정과 말투였을지 짐작이 갔다.



엄마는 아빠와 사이좋게 잘 지내다가도 뭔가 서운한 게 생기면, 아빠가 젊었을 때 잘못한 것들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휘리릭 지나간다고 한다. 그래서 화가 올라오고 옛날 그때의 감정에 똑같이 휩싸인다고.


추측건대 최근에 아빠가 무슨 모임회장을 맡고서는 바쁘셔서 엄마와 시간을 많이 못 보내신 듯하였다. 엄마는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많을 때는 표정이 환하니 좋은데, 반대의 상황일 때는 얼굴표정부터 대번 바뀐다.

 

엄마가 아빠와 다툴 때마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상황이 심각할 땐, 아빠는 딸들에게 하소연하고 우린 엄마맘을 풀어주려 애쓰는 무한 반복. 평화를 중재하는 딸들에게 엄마는 옛날 일을 얘기하시고, 절대 용서는 할 수가 없노라고 선언하신다. 아빠가 엄마맘 아프게 한 것을 여러 차례 사과하셨다는데도, 단연코 용서는 안된단다.


나는 매번 반복되는 상황에 속이 터질 듯 갑갑했다.

작정을 하고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얘기했다. 이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제 여든이나 되셨는데
이제 좀 성숙하셔야지.
아빠가 잘못하신 건 수십 년 전
과거인데, 엄마는 아직도 과거에 묶여서
현재가 괴로우면 어떻게 하냐.

사람이 현재에 발을 딛고
살아야지
과거에 살고 있는 거 아니냐.
이렇게 원망으로
현재를 채우고 살면
나중에 죽을 때 후회 안되시겠냐.

매번 이렇게 똑같은 상황
반복하시는 거
딸들도 스트레스받는다.
좀 사이좋게 평화롭게
지내면 안 되냐.

의심을 습관처럼 하기 시작하면
뇌건강에도 좋지 않다.
치매의 초기단계가 의심인데
아빠가 놀라지 않으셨겠느냐


엄마는, 그래 너네는 아빠 편이지, 하고 삐지셨다. 

나는, 자식이 누구 편이 어딨냐, 속상하고 안타까워서 그런다, 고 말했다.




어린 시절, 엄마아빠 때문에 우는 밤이 많았다. 두 분이 자주 싸우셨다. 

남들 부모도 그만큼은 싸우는데 내가 조숙하고 섬세한 기질이었던 건지, 내 부모님이 유난하셨던 건지는 모른다. 기억은 자의적이고 때론 좀 과장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엄마와 아빠의 존재가 내 '우주'일 나이에 부모가 자주 싸우니, 나는 불행하게 느껴졌고 깊게 슬펐고, 베갯잇을 적시며 숨죽여 울곤 했다.


내 나이 12살의 일주일을 잊지 못한다.

엄마가 어느 날 나를 불러놓고, 당신은 아빠 때문에 한동안 가출을 할 거라고 얘기하시곤, 국 끓이는 법, 밥 하는 법 등을 알려주며, 모르는 건 윗집 아줌마에게 물어보라 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 엄마는 진짜 가출하셨다. 


나는 크면서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성숙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여러 의미로 성숙하게 된 계기로 작용한 일주일이었다.


아빠는 어린 내가 피를 토하는 심정(그때 정말 슬프고 비장했다!)으로 써서, 아빠 양복 안쪽 주머니에 넣은 여섯 장짜리 편지를 읽고서야 엄마를 모셔 오셨다

- 나중에 내가 결혼한 한참 후, 아빠 편지에 대해 처음 언급하셔서 알게 된 사실이다. 내가 쓴 여섯 장짜리 편지에 감동해서 마음이 움직이셨다고. 그 편지를 쓴 12살짜리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실 거다. 



가끔 엄마아빠에 대한 화가 올라올 때가 있는데, 이런 일로 한 번씩 휘저을 때다.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확 일어, 힘들다. 

엄마아빠는, 내가 내색하지 않으니, 내 안의 깊은 곳에 상처받아 슬픈 아이가 있는지 모르신다. 언제나 든든하고 사려 깊은 맏딸이라고만 생각하시고 의지하신다.


엄마는 아빠얘기와 더불어, 당신 엄마(외할머니) 얼마나 당신께 사나웠는지 얘기하셨다. 당신 성격이 지금같이 된 건, 외할머니에게 사랑을 못 받아서라고. 나는 하마터면, '엄마가 사납쟁이어도, 나는 안 그렇잖아! 답습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라고 얘기할 뻔했다.


당신은 80 나이에도 아직도 자주, 자기 연민에 빠지시면서, 당신 딸은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며, 당신을 원망하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했는 모르신다.     


드라마를 보다가, 참 별거 아닌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안다.

내 안의 ‘상처받은 아이’를 건드렸구나. 그럼 토닥이는 마음이 들며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얼마나 감사하냐, 하며 위로한다. 굳이 과거를 꺼내 지금 괴로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엄마는 이번에도 나와 동생과 대화 중, 당신이 우리에게 무섭게 대했던 걸 떠올리며 살짝 눈시울을 붉히셨다.

- 사실 엄마의 이런 각성은 남동생이 황망히 우리 곁을 떠난 후, 한 번도 둘째 아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데에 대한 통한의 후회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엄마를 이해하고 사과를 받아들였는데, 엄마는 왜 아빠가 여러 번 사과하셨는데도 그렇게 용서가 안되시는 건지 안타깝다. 아빠의 사과가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가슴 아프다.


굳이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려 하면, 83. 80 연세에도 사랑싸움을 하시는가 싶기도 한데, 솔직한 마음은 철이 없어 보인다.

자식들 겨우 키우고 나니, 애가 된 부모님이 앞에 계신다. 



엄마를 위한 변명

사람은 다양한 면이 존재한다.
내 엄마는 기본적으로 헌신적인 분이시다. 내, 세 번의 산후조리를 정말 정성껏 혼자 다 해주셨고, 큰 아이 때는 천기저귀를 손수 만들어 일일이 손빨래를 해 주셨다. 산후 미역국도 내가 질려 잘 안 먹을 까봐 소고기 미역국, 굴 미역국, 우럭 미역국 등 번갈아 가며 다양하게 끓여 주셨다. 지금도 아빠가 드시고 싶다는 요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드린다.

사랑을 표현하고 살아야 함을 뒤늦게 깨우치셨는데, 그게, 쌓인 게 많은 남편에게 적용하는 건 쉽지 않으신가 보다. 손자녀들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씀도 잘하시는 세상 따뜻한 할머니다.  

아, 엄마는 당연히 암이 아니고 너무 오래 웅크리고 앉아 불경을 많이 읽으셔서 근육이 여기저기 뭉친 거다. 악세서리함은 아직 못 찾으셨는데, 엉뚱한 데서 나올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얼마 전 있었던 일을 써놨었는데, 못 올리다 올립니다.

다행히 친정엄마는 좋은 쪽으로 조금씩 성장하고 계시는 듯합니다(여든의 엄마에게 성장이라는 말이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느낍니다). 아빠와의 관계도 잘 유지하고 계십니다. 딸들의 잔소리를 그냥 무시하지 않으시고 조금씩 귀 기울여 주시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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