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에게 지금의 상황보다 죽음이 더 만연했던 경험은 없었습니다. 코로나19 발생 불과 100일 만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2년이 채 안된 지금까지 4백만 명 넘는 사람이 가족 곁을 떠났습니다. 뉴스에서는 가급적 죽은 사람의 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시신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은 우리 문화의 금기이기 때문입니다. 4,000,000이라는 숫자로는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비극의 크기를 절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평소 애써 무시하며 살고 있는 진실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죽습니다.
이 진실 앞에 모든 것은 무력해집니다. 우리가 추구해마지않는 행복마저도 죽음 앞에서는 그 빛을 잃고 초라해집니다. 성경 전도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중략)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중략)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죽음은 두렵습니다. 어둡고 답답한 관속에 영원히 갇힌다는 상상은 우리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공포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몸은 분해되어 대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겠지만 의식은 어찌 될까. 영혼은 존재할까?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은 죽은 후에도 유지되는 것일까. 아니면 육신처럼 사라져 버릴까?
여기 찻잔에 담긴 물이 한 잔 있습니다. 물의 모양은 찻잔의 생김새에 따라 결정되겠지요. 원통형일 수도 있고 직육면체일 수도 있고 납작할 수도 있습니다. 이 찻잔에 담긴 물은 다른 찻잔에 담긴 물과 구별됩니다. 강물이나 지하수나 바닷물과도 구별됩니다. 이 찻잔에 담긴 물은 온도가 변하고 흔들리기도 하고 양이 줄어들거나 늘어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찻잔의 물은 다른 물과 구별된, 이 물만의 정체성을 갖습니다. 이제 이 물을 쏟아봅시다. 이 물은 바닥에 잠시 고여있다가 증발하여 대기 중에 분자 형태로 떠돌아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수증기를 만나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바다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 물은 대양의 일부가 되어 수백 년에 이르는 거대한 순환을 하게됩니다.
찻잔에 담긴 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이 찻잔에 담긴 물을 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그 무엇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자의식, 정신, 영혼 무엇이라 이름 붙여도 좋습니다. '죽음'이란 '잔에 담겨있던 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우주의 일부가 되어 거대한 순환에 동참하게 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 <싱글맨>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우리는 여기, 조지의 몸이라 알려진 몸을 보고 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조지의 전부일까? 북쪽, 해안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절벽 아래 화산암 암초에는, 물웅덩이가 많다. 썰물 때에 그곳에 갈 수 있다. 웅덩이는 제각기 다르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웅덩이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조지, 샬럿, 케니, 스트렁크 부인, 조지를 비롯한 사람들을 각기 하나의 전체라고 가정한다면, 웅덩이 하나를 하나의 전체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웅덩이는 전체가 아니다. 그 물을, 가령, 의식이라고 생각하면, 우울한 걱정, 입을 앙다문 탐욕, 생생한 직감, 껍질은 깨어져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습관, 깊은 곳에서 반짝이며 숨은 비밀, 신비하고 위협적으로 빛이 있는 표면으로 움직이는 무서운 단백질 유기체 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것들이 어떻게 한데 존재할 수 있나?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물웅덩이를 이룬 바위는 그 세계를 모두 담고 있다. 그리고 썰물 때에는, 그 개체 모두는 서로를 전혀 모른다. 그러나 마침내 긴 하루가 끝나고, 밀물 때인 밤이 온다. 바닷물이 밀려들어서 웅덩이를 뒤덮듯, 잠든 조지와 사람들도 다른 바닷물, 의식의 바닷물에 잠긴다. 특별히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닌 의식, 모든 사람과 모든 것,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은 의식, 가장 높이 뜬 별까지 쭉쭉 뻗는 의식. 우리는 직감으로 분명히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조의 어둠 속에서 이 생명체들 몇몇은 웅덩이를 빠져나와서 더 깊은 바다로 떠돌아다닌다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나누고 이름 붙이고 경계를 짓는데 너무나 익숙합니다. 나와 나 이외의 것을 나누고 나의 정신과 육체를 나눕니다.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고 육체는 각 부위별로 나눕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때까지 경계를 지은 다음, 각각을 분석합니다. 인류는 이런 방식으로 지식을 쌓아왔습니다.
이에 비해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너무나 미숙합니다. 사실 몸과 마음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와 타인, 인간과 자연이 모두 연결돼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 본질적으로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삶과 죽음도, 동전의 양면일 수 있습니다.
13세기 독일의 기독교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신께서 만물에 깃들수록 그 바깥에 계시도다.
내부에 계실수록 더욱 외부에 계시네.
로마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해 개선식을 거행하는 장군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고대 인도인들은 가장 중요한 진리를 한 문장에 담았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다음과 같습니다.
tat tvam asi 그대가 곧 그것이다.
✈ 그림 설명: 캐나다 오타와에 있는 리도 운하(Rideau Canal)를 종이에 과슈로 그려보았습니다. 거울같은 운하에 비친 구름과 하늘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리도 운하는 총 연장이 200km가 넘는데 겨울이 되어서 꽁꽁 얼면 스케이트를 타고 달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저희가 오타와를 방문했을 때 마침 한국의 대통령이 이 도시를 방문했는데요. 거리에 걸려있는 태극기가 반가웠습니다. 오타와에는 비버 꼬리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비버테일이라고 이름 붙인 밀가루 반죽 튀김이 유명한데요. 우리나라 찹쌀 도넛을 납작하게 늘려놓은 것 같은 모양과 맛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먹는 사진이 가게 앞에 붙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