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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희 Oct 23. 2021

캘리 愛 빠지면,

캘리그라피가 이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았다. 글씨를 쓰는 것이지만 그린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몇 해 전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직접 쓰신 캘리그라피 작품을 보내주셨다. 액자와 부채와 컵 받침용 2개에 쓰인 글씨체를 보고 따뜻한 선생님의 마음을 받은 찡한 감동이었다.      


선생님은 대학 졸업 후 첫 발령 받은 여고에서 문예부 담당을 하셨다. 서울에서 오셨고 학교 근처에서 하숙했다.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결혼 후에는 학교를 그만뒀다는 소식까지 들었고 각자의 삶을 살았다. 여러 해가 지나고 우리는 여행자와 항공사 직원으로 재회했다. 귀에 익은 서울말이 들렸다. 

“어머 얘 좀 봐” 

(누군데 얘야?) 선생님!

선생님은 수속받기를 기다리며 카운터를 둘러보는데 내가 보였다는 것이다. 차례를 미루며 내게 수속받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앞선 손님 수속 후 입력할 사항을 넣고 있는데 쓰~윽 얼굴을 들이밀었다.      


끈이 이어졌다. 아이를 키우는 고뇌하는 엄마 입장으로 서로 연락했고 공항에서 몇 차례에 만났다. 약속된 만남으로 공항에 일찍 오셔서 커피 한 잔을 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안쓰럽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하셨고 여행을 다녀오신 후 캘리그라피 선물을 보내주셨다. 치열한 30대를 살아가는 제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글자는 감사를 선택하셨지만 짧은 편지 사이사이에 느껴지는 못 다 쓴 말들이 보였다. 그렇게 캘리그라피 愛 매료됐다. sometime(언젠가) 나도 선생님께 글을 써서 보내드리리.     


수업이 완료하는 시점에 알았다. 5주 동안 만났던 강사님이 『감정 愛 쓰다』 작가 중 한 분이었다. 수업을 받은 곳은 서울대 입구에 있는 <자상한 시간>이라는 동네서점이다. 가본 적 없는 서점이지만 블로그 이웃으로 소식을 보고 있었다. 세상일은 우연이 많다고 생각한다. 계획적으로 자상한 시간을 검색하지 않았다. 캘리그라피 수업을 한다는 공지를 봤다. 수업료는 무료에다 온라인 화상 수업으로 진행한다는 점에서 신청을 미룰 수는 없었다. 10명 안에 들어야 했기에 얼른 신청했다. 순식간에 마감되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부산에서 앗싸!     


수요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두 시간 수업이다. 10시부터 준비하고 책상에 앉아서 붓펜과 연습장을 만지작거렸다. 다양한 캘리그라피(이하 캘리) 도구가 있는데 우리는 붓펜을 사용했다. 붓펜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가로, 세로 선을 그었다. 굵기는 누름과 잡기에 따라서 변화를 줄 수 있었다. 자음과 모음 쓰기 과제를 단톡방에 올리기도 했다. 구도 잡기와 다양한 글자 모양을 연습했다.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강사님의 글씨는 오랜 연습의 결과임을 알면서도 그저 부럽기만 했다. 명절날 전을 부치고도 쉴 때는 붓펜을 잡았다는 이야기에 치열한 습작의 시간이 보였다. 쉴 때 누워서 책을 읽는 나를 볼 때 남편이 도리질하는 모습과 닮았다. “눈을 쉬어줘야지 그 눈으로 책을 읽지, 혹사하지 말아라”     


가끔 수업이 한 시쯤에 끝나기도 했다.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애쓰다 보니 기진맥진이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커피를 한 잔 갖고 와서 다시 시작했다. 복습 겸 연습이다. 캘리 수업을 모집할 때는 전시회를 한다는 명시가 없었는데 전시회를 한다는 것이다. 지원사업이고 결과물을 보고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처음이라도 ‘이건 아니지’라는 수준으로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담스러웠고 중간에 일이 있다고 변명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어떻게 할지 궁리하는데 국어 선생님이 떠올랐다. “선물을 해드리면 되겠다.” 선생님도 캘리를 배우고 연습해서 전시회도 하셨다. 같은 길을 간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해하며 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 현실은 마음과 달랐다. 우선순위에서 맨 꽁지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10월 15일 수업 종료. 2주에 한 번, 추석 연휴 포함 석 달을 만났다. 짧은 만남 긴 여운이 남는 시간이었다. 중요한 것은 나도 캘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움의 현장에서만 알 수 있는 속칭 ‘깨알 팁’이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었다. 책에서는 알 수 없는 그런 것 말이다. 피하려고 했던 전시회 작품을 준비해야 할 차례가 왔다. 문장을 고르기 위해 몇 권의 책을 펼쳤다. 목적 읽는 책 읽기를 할 때는 목적에 적합한 문장이 보였다.      

『시와 산책』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하고 골랐다.

초보 수준으로 문장은 길지 않아야 한다. 

품격이 있는 문장으로 감정을 건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부산을 느낄 수 있는 단어가 포함되면 어떨까. 

행복, 바다, (품)격, 함께, 와 같은 단어가 좋았다. 일곱 문장 중 두 개를 선택했다. 

행복은 마음의 격을 지키는 것과 바다는 저 혼자 아름답지 않다     


문장을 선택했으니 어떤 단어를 강조할 것인지 결정하고, 구도를 잡으며 몇 줄로 쓸지 생각하고, 마음을 담아 쓰면 된다. 연습장에 같은 문장을 다양하게 쓰지만, 초보자의 한계는 스스로 정하지 않아도 드러났다. 교재를 펴서 글자를 유심히 보고 따라 쓰기도 했다. 줄도 그어보고 흘려 쓰는 ㄹ자 연습도 했다. 카드 위에 써보며 감각을 익혔다. 어느 한 자 허투루 쓰지 않아 잘못 썼다고 찢어버릴 수 없었다. 한 글자가 마음에 들면 다른 글자가 석연치 않았고, 또 그 글을 연습해서 쓰면 다른 글자가 맘에 들지 않았다.      


연습한 시간은 적어도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했다. 읽는 시간을 빼고 쓰는 시간에 투자했다. 3일 동안 약 12시간을 사용해서 연습하고 바탕색을 칠했다. 봐줄 수조차 없는 삐뚤빼툴 한 글씨에서 캘리처럼 보이네 수준은 되었다. 용기 내어 단톡방에 작품을 올렸다. 강사님도 ‘엄지 척’을 해주셨고, 선생님들도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었다. 갑자기 재미가 붙었다. 재밌으면 큰일이다. 캘리 愛 빠지면 또 도구들을 사들일 텐데. 욕망을 제어하는 굵은 목소리가 들린다. 안돼! 안돼!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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