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산 배낭! 새로 산 텐트! 새로 산 신발!
'그 바이러스'의 여파로 비엔나에 온 뒤로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게 한이 돼 원래는 여행을 떠나기 직전 사려고 했던 텐트를 질러버렸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여행하기엔 역시 캠핑만 한 게 없지
그렇게 아마존을 통해서 산 텐트를 혼자 집에서 쳐보고 괜히 배낭도 한 번 메 보면서 연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휴무가 3일이나 연달아 있는 덕에 근처 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내친김에 알프스 산 중턱에서 하룻밤 자고 오는 것을 목표로 할슈타트 근처 Dachstein 으로 향했다.
요 며칠 동안 분위기가 살살 잠잠해지는 감이 보이더니 드디어 지역 간 이동에 관한 규제가 완화됐다, 하지만 역시 말 잘 듣는 오스트리아 주민들은 이동을 자제하는 듯, 기차와 거리는 텅텅 비어 있다. 양심의 가책이 조금은 들었지만... '동네 산책 정도라고 생각해주세요...'
비엔나 Hauptbahnhof 역에서 약 2시간을 달려 Wels에 도착. 기차를 갈아타고 다시 2시간여를 더 가면 도착이다. Wels역에서 한 시간쯤 오니 슬슬 알프스의 만년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거의 안 내려 새 하얀 산은 보기 힘들었지만 갑자기 떠난 여행에서 설렘을 주기엔 충분했다.
할슈타트에 도착하기 한 정거장 앞에서 같은 객실에 타고 있던 할아버지가 말씀을 거신다.
"다음 역이 할슈타트이긴 한데 배가 없어!"
'오잉?... 지난번에 들렀을 때는 버스를 타고 마을에 들어갔는데 무슨 배? 뭐지 내려야 하나...'
우선 역에서 내려 아저씨와 몇 초간의 짧은 대화를 했다. 대충 분위기를 보니 걸어가야 하는 것 같은데 우선 다음 역까지만 가보자. 급하게 열차에 다시 올랐다.
역 이름이 Hallstatt라 내리긴 내렸는데 웬걸 마을이 강 맞은편에 아주 작게 보인다. 기차를 타고 올 경우에 원래는 이 역에서 내려 작은 배나 버스로 갈아탄 후 목적지인 마을까지 들어가는 모양인데 전부 운행을 중지한 상태였다. 지도를 살짝 보니 걸어서 갈 만한 거리인 데다가 워낙 풍경이 아름다워 산책 삼아 걸어가기로 했다. 아직은 싱글벙글 신이 나있지만 문득 생각이 들어 말을 꺼냈다.
'한 3시간쯤부터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은데 그걸 알면서도 지금 이렇게 신이 난다야ㅋㅋㅋㅋ 재밌다잉'
오는 길에 마주친 자전거를 탄 아저씨나 산책하는 가족들에게 물어보니 이 길만 쭉 따라가면 된다고 한다. 강가를 따라 걷다가 국도로 보이는 길을 두어 시간 정도 걸으니 반가운 표지판이 보인다. 마을로 들어가자!! 아침에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오후 2시가 넘었는 데에도 공복이라 빨리 마트에 가 장을 보고 산에 들어갈 생각에 신이 났다.
비엔나는 마트와 작은 상점 정도는 운영을 하는 중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딱 하나 있는 마트는 도착 30분 전에 문을 닫았고 상점들도 당연히.... 우선 먹을거리라도 찾으러 마을을 탐색했다. 휴양지, 관광지, 많은 인파가 몰리는 장소인데.... 만나는 주민들마다 물어봤지만 역시나 지금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없단다.. 원래라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요리를 만들어내고 있을 수많은 레스토랑의 불 꺼진 테이블을 들여다보며 성냥팔이 소녀를 떠올렸다... 흐잉..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동네를 구경하면서 물배를 채우던 도중 영업 중인 카페를 발견했다.
는 아니고 그냥 동네 주민들이 모여서 노가리에 맥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영업 중인 가게가 아닌 걸 확인하고는 돌아서 다시 강가에 앉아 물만 마시고 있었는데 아까 마시고 계시던 맥주가 간절히 생각났다. '딱 두 캔만 팔아달라고 해야겠다..'
다시 돌아가자마자 사람들이 반겨준다. 가벼운 춤을 추며 다가가 바로 본론을 말했다.
"저기. 여기 다 돌아봤는데 마트도 없고 식당도 다 닫은 것 같은데 혹시 맥주 좀 남는 거 있어? 두 캔에 10유로에 사고 싶은데.. ㅎㅎ"
아포칼립스 상황에선 물가가 치솟다 못해 화폐의 가치가 사실상 의미 없어지는 상황이 떠올랐다.
슈퍼마리오를 닮은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잠깐 있어봐"
예쓰. 됐다. 330ml짜리 작은 맥주캔 두 개를 들고 집에서 나오는 아저씨를 박수로 맞이한다. 돈을 건네고 감사를 표하려는데 그냥 마시라며 거절한다. 다시 감사를 전했지만 다시 거절한다. 두 번의 거절 이후의 선행은 오히려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바로 캔 뚜껑을 따 벌컥벌컥 마시며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화답했다.
전에 말레이시아에서 만났던 한 여행자에게 'Couch surfing'이라는 어플을 소개받은 적이 있다. 아직 사용해 보진 않았지만 쉽게 말해 '무료 에어비앤비'라고 생각하면 쉽다. 말 그대로 집 거실에 남는 소파나 빈방을 어플에 올려두면 여행자들이 며칠 묵고 가는 시스템이다. 물론 신상정보는 상세히 기록하고 서로의 충분한 합의가 이뤄졌을 때 숙박이 가능하다. 여행자는 무료로 묵어가는 대신 저녁식사나 술자리에 앉아 자기 나라의 문화나 여행 이야기를 공유하며 숙박료를 대신한다. 사실상 서로의 가치를 교환하기 때문에 따지고보면 무료가 아니긴 한데 무튼 아주 훌륭한 아이디어임은 분명!
제작자의 훌륭한 아이디어가 묻어나는 어플에서 영감 받아 그 후로는 선의를 받으면 꼭 앉아 대화를 나누곤 한다. 이번에도 역시 맥주에 대한 보답과 흥미로 그들의 말동무가 되기로 했다.
"요새 코로나 때문에 장사도 못하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겠어요.."
/나도 원래 식당 사장이고 이 친구는 맥주집, 이 친구는 기념품 가게를 하는데 지금 아무것도 못하고 굶어 죽게 생겼어. 그래도 다른 나라나 지역에 비해서는 안전한 편이니까 그걸로 만족해야지 뭐
"그럼요 안전이 우선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다행이라고 봐야겠네요! 이참에 푹 쉬시고 재충전하시면 되겠어요!"
/ 그런데 너희들은 어디서 온 거야?
"한국!"
/ 아니 그러니까 한국에서 어떻게 온 거야?
"아! 한국에서 비엔나로 12월에 왔고 거기에서 쭉 살다가 이번에 산책 삼아 돌아보고 있죠"
그제야 상황이 이해된다는 듯 사람들은 일제히 '아~ 그랬던 거구나~' 라며 한 마디 덧 붙인다.
/ 앞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다 물어볼걸ㅋㅋㅋ
슬슬 자리를 일어나려는 찰나 마우스마운트를 이용해 입에 물고 있던 고프로에 관심을 가진다. 하이파이브로 마무리!
한 껏 가벼워진 마음으로 2년 전 사진을 찍었던 곳에서 다시 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셔츠에 단정한 머리 차림이었는데 지금은 훨씬 자유로운 모습이다. 예전엔 주변에서 짧은 머리와 단정한 옷차림이 잘 어울린다는 말에 좋아하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어색한 표정과 몸짓으로 포즈를 취했지만 이젠 비로소 나의 모습을 찾은 듯하다. 나를 인정하고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편견 없이 궁극적인 그 자체의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되는 듯하다. 필요 이상의 비교와 우위를 정하는 행위는 의미가 없어졌다.
주차장에서 만난 고양이다. 사실 강아지이다. 사람이 그리웠는지 가는 길마다 눈에 띄게 앉아 관심을 요구한다. 길을 잘 알아 샛길로 요리 조리다녀 관광객들을 구경했던 모양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아까 미쳐 보지 못했던 기념품 가게를 발견했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지난번에 들러 신발을 살까 말까 고민했던 가게이기도 하다. 단 한 번의 경험에서 오는 향수를 즐기며 구경하다가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정리된 과자와 음료를 보곤 환호를 질렀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다잉'
칼로리가 높은 과자 위주로 몇 개 주워 담고 맥주와 와인을 사 떠날 채비를 했다. 오다가 스쳐봤던 자판기에서 필요한 것들을 조금 더 구하고 슬슬 산에 들어가야겠다.
시간이 많이 늦은 데다가 원래 가려고 했던 Dachstein 산 까지 가는 버스도 없는 탓에 그냥 눈에 보이는 산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있는 지역 짤츠캄머굿(Salzkammergut)은 독일어로 '소금 창고 소유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말 그대로 이 지역에는 소금이 아주 많다. 암염의 형태로 산을 이루고 있어 과거부터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회색산이 전부 소금이 함유된 산들이다. (실제로 근처까지 가보니 굉장한 경사에 물이 졸졸 흐르는 아주 위험한 바위산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땅이 침대마냥 폭신폭신하더라)
3시간 정도 산에 오르다 보니, 더 이상 올라가도 하루 묵을만한 평지를 찾기 힘들 것 같아 그나마 평평한 곳에 텐트를 쳤다. 바닥이 폭신해 등 배길 걱정은 없을 듯.
드디어 신발을 벗고 오는 길에 떠놨던 물을 한잔 마시고는 그대로 누워 모바일 배틀그라운드를 하며 휴식을 취했다. 슬슬 노을이 지려해 아까 사 온 맥주와 짤츠부르크산 와인을 꺼내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건지 이러려고 일부러 고생하는 건지는 몰라도 뿌듯하다 ㅎㅎ
방심했다. 아까 그 푹신한 바닥은 습기를 그대로 먹어 냉기를 뿜어대고 내 텐트와 장비는 여름용이다. 잠에 들고 술기운이 사라지며 더 이상 간에서 해독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니 체온이 떨어져 결국엔 추워진다... 새벽 5시 새소리가 들리자마자 생각했다.
'이제 곧 해가 뜨려나 봐... 좀만 더 버티자'
버티긴 무슨 바로 일어나서 텐트를 접고 몸을 움직였다. 아침 차를 타고 비엔나에 돌아가야 하니 설렁설렁 하산합시다.
어쨌든 내 첫 해외에서의 캠핑은 꽤 스펙타클하게 흘러갔다. 이제 집에 가자마자 씻고 맥주 캔 마시고 그대로 뻗어서 자야겠다. 저녁은 간만에 불닭이나 끓여먹어야지 ㅎㅎㅎ
도시에 들어서니 날이 따뜻해진다. 그대로 한인마트에 들러 불닭을, 마트에 들러 치킨 윙 몇 조각 사서 들어가야겠다.
여기는 어제 잠시 산책을 다녀온 공원이다. 아주 귀욤귀욤
오늘은 구름이 참 솜 뭉텅이 같다. 귀여운 하루가 될 것 같구나.
갑자기 추노를 치고는 독일로 떠났다가 폴란드에서 한 달 반 넘게 감금됐던 태성이가 돌아와 캠핑을 다녀오고 난 뒤 일주일이 흘러 다시 휴일이 됐다. 이번엔 어디를 다녀올까 하다가 지도를 켜 여기저기 검색해본다.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은 공원이 있어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무엇보다 여긴 사슴들이 쉬러 온다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인 민들레가 사방팔방에 널려있다. 노란빛의 환한 민들레도 물론 아름답지만, 일생을 보내고 다시 꽃이 되려 하는 그때의 민들레 역시 낭만적이다. 살아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세상에서 생명의 순환은 참 경이롭다. '생명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사람과 개미, 코끼리와 민들레와 같은 '다양한 종'이라는 건 결국 각자 어떤 한 부분을 차지하는 동일한 구성원이니까.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막연한 가르침 대신 우리의 진화과정과 함께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명의 연결고리, 그것들이 만들어낸 경관, 즉 이유를 보여준다면 더욱 강렬하게 각인되지 않을까? 물론 업진살이야 살살 녹지만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호주 하면 역시 캥거루. 공원에서 자유로이 뛰어노는 캥거루들이 귀엽다. 특히 그 사슴 같은 눈망울은 정말 사랑스럽다...
다음 주에는 Grünersee에 다녀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