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strip May 09. 2020

[Österreich] 겨울엔 공원 여름엔 호수

Grüner see(그뤼너세) 캠핑

1. Grüner see - 드디어!

 전에 같은 가게에서 일했던 Melisa의 차를 얻어 타고 다녀오려 했지만 인스타를 보니 너무 바빠 보여 그냥 룸메 노태성군과 다녀오기로 했다.
스마트카 만세
 이전에 미리 찾아봤던 Grüner see에 다녀오기로 했다. 대중교통으로는 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루트를 살펴보니 기차 + 버스의 조합으로 다녀올만하더라, 다만 기차표가 편도 45유로... 이 가격이면 걍 렌트해서 다녀오지.

 EasyRent-cars 어플을 이용해 가장 저렴한 오토차를 한 대 빌렸다. 비엔나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2인승 스마트카, 코딱지라 부르기로 했다. 기가 막히게 번호도 4444인 게 강압적으로 풀커버 보험을 들게 만든다. 하여튼 12시에 차를 예약하고 집 앞 중앙역(Wien Hauptbahnhof)에서 사무실을 찾아봤다.


‘다 문을 안 열었는데?’


우선 예약할 때 받은 번호로 전화해보니 문제가 생겨서 직접 차를 가져다준다고 한다. 시간이 좀 걸린다는데 크게 상관없으니 한 시간 뒤 집 앞에서 보기로 하고 장을 본 뒤 다시 집으로 향했다. 물을 한잔 마시고 좀 누워있으니 연락이 온다.


“도착했어 내려오세용~”

호주와 다른 풍경의 도로


  면허증은 한국에서 땄지만 운전경험이라 해봤자 한 달에 두어 번 쏘카나 그린카로 근처 드라이브를 다녀온 게 전부다.(그것도 차 없는 밤에 다녀온 한강 정도...)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혼자 로드트립을 다녀오고 친구들이 온 이후론 중고차를 구매해 타고 다니는 덕에 운전실력이 꽤나 늘었다. 문제는 일본처럼 오른쪽에서 하는 운전에 익숙해진 것뿐. 오스트리아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왼쪽에서 운전을 하고 오른쪽 차선을 탄다. 다행히 20년 동안 축적된 습관으로 금세 익숙해지고선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전엔 호주의 넓고 황량한 평야가 최고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달려도 도로 끝자락에서 멀어지지도 , 가까워지지도 않는 알프스의 만년설을 보며 운전하는 것 역시 아름답구나.


Bruk an der Mur
 비엔나에서 대중교통으로 가는 루트

비엔나 중앙역(Wien Hauptbahnhof) -> Bruck an der mur [기차로 약 2시간] ->종착역 [역 앞에서 175번 버스를 타고 43분] -> 도보로 약 20분

 

 우린 비용절감을 위해 렌터카를 이용했지만 혼자서 대중교통을 타고 충분히 다녀올만한 거리다. 낭만과 소소한 즐거움을 위해 대중교통을 타고 가는 것도 아주 추천!


도착!


 호수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금만 걷다 보면 호수 입구가 나타난다. 멀리서도 반짝이는 초록빛 호수가 걸음을 멈춰 감탄하게 한다. 이날은 하루 종일 ‘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돼, 미쳤다 진짜. 미쳤네’만 수십 번은 반복했던 것 같다. 호수가 그리 크지 않아서 한 바퀴 산책 겸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이 아예 없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약 네 팀 정도가 여기저기 앉아 사진도 찍고 쉬고 있는데 우리 빼곤 전부 강아지를 데리고 왔더라.


“형 여기서 저렇게 사는 강아지들은 분명히 성격도 다르겠지?” 태성이가 물어본다.


아 거리에 그 수많은 강아지들이 하나같이 성격이 온순한 이유를 알아냈다. 얼마나 행복할까. 한 칸짜리 원룸에서 친구와 자취를 하던 내 모습보단 저렇게 자유로이 뛰노는 강아지의 삶이 배는 행복할 거야. 냄새를 맡고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햇볕을 쬐는 둥, 단순한 것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감내해야 할까. 꼭 그래야 할까. 많은 생각이 스친다.


사진 스팟

 호수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보이는 풍경이다. 다들 저 돌 위에 앉아 사진을 찍던데 가만 보니 뭍에서 거리가 꽤 있다. 워커를 신고 있으니 물을 가로지르는 건 좀 그렇고 다른 장소를 찾아봐야겠다.


포카리맛 물

 왜인지 포카리스웨트나 파워에이드 맛이 날 것 같은 색이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 물이다. 겨우내 내렸던 산의 눈과 얼었던 물들이 녹아 기슭을 타고 이곳으로 모인다. 늦은 여름부터 마르기 시작해 듬성듬성 풀이 자라난 공원은 봄이 되어 같은 색의 호수가 된다. 보통 4월부터 8월 사이에만 물이 찬 호수를 볼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이 호수에는 눈에 보일만한 물고기가 살지 않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맑고 텅 빈, 마치 동남아 어느 섬의 바다가 보인다. 알프스의 눈이 녹아 생긴 호수라 수온은 얼음장이니 수영은 꿈도 못 꾸지만 말이다.


장자지몽
가끔 웅장한 자연을 보면서 이상한 소속감을 느끼곤 한다.
내가 그들의 일부였다는 사실과 그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세상에 태어나 다시 돌아왔다는 점에서 느껴지는 벅차오름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과학을 사랑했다. 호기심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과학이 알려주는 이 세상의 경이로움을 알아가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


 태초에 쿼크와 같은 입자들이 모여 수소원자가 생겨나고 그것들이 모여 항성이 된다. 핵융합 과정으로 헬륨이나 리튬 같은 상대적으로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어내는 항성은 수명이 다하면 폭발과 함께 우주 전역으로 원자들을 뿌려댄다. 그런 것들이 다시 모여 조금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고 다시 폭발, 융합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우주다. 우리의 지구를 구성하는 약 80여 종류의 원소들도 모두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고 우리의 몸 역시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나의 왼팔과 오른팔 너의 눈과 코는 각기 다른 별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우리는 별들의 자식, 즉 우주의 구성요소들이다. 우리가 우주를 관찰하고 탐구하는 일련의 과정들의 의미는 우리를 만들어낸 우주의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광대함, 찬란함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가끔 밤하늘도 올려다보며 우리가 왔던 곳을 상상해보자. 지나치는 사람들과 길가의 꽃, 죽어가는 나무


이번엔 빵이라도 좀 챙겨와서 다행이야

 허기가 느껴져 가져온 빵을 조금 먹었다. 살구잼이 듬뿍 들어간 페이스트리에 깡생수를 마시고 슬슬 잠자리를 찾아 자리에 일어났다.



2. Trieben - 다음 장으로

여기가 딱 좋긴 한데..

Grüner see 한편에 넓은 땅에 자리를 펴고 별을 보며 잠을 자면 말 그대로 환상적이겠지만 아무래도 근처에 사람이 있으니 마음대로 텐트를 쳐 쉬는 건 위험할 듯했다. 혹시나 해서 보이는 몇 무리의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이곳은 캠핑 금지구역. 이번엔 캠핑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Camping am see

 구글 지도에 캠프사이트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한적한 곳에 있는 펜션을 소개해준다. 약 15개에서 하나 꼴로 무료 캠핑스팟을 찾을 수 있는데 우리가 찾은 곳도 같은 방법으로 찾아냈다.

 지도에 ‘8783 Gaishorn am see’로 검색하면 Trieben 옆 Camping am see 라는 공원을 안내해준다. 멀찍이 보이는 설산과 양쪽으로 뻗어있는 두 개의 호수, 넓고 평평한 땅과 작은 놀이터. 아주 알맞다. 고민할 거 없이 바로 텐트를 쳤다.

놀이터!

 전에도 언급한 적 있는 것 같은데, 난 여행에서 빨래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뭔가 정말 현지인들의 삶 그대로를 보는 것 같고, 근처를 거닐다 보면 어느새 동화되어 일부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놀이터에 가는 것도 좋아한다. 아직 세상에 대해 잘 모를 때, 순수 그 자체인 아이들이 그들만의 제한된 세상에서 행복하게 뛰어노는 모습이야 말로 가장 ‘그 지역 다운 것’이지 않을까? 아참, 학교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달아 달아 너무 달아

 해가 슬슬 지며 맞은편에선 달이 차츰차츰 떠오르기 시작한다. 지평선 근처에 달이 있을 때는 착시현상 때문에 실제 크기보다 커 보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의 달은 유난히 거대하다. 가득 찬 보름달이 태양빛을 덮어갈 때 즈음엔 아까 해가 있던 자리에서 금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금성은 보통 아침 일찍이나 저녁 무렵쯤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저녁에 보이는 금성을 ‘개밥바라기’라고도 부른다. 저녁식사 시간이면 마당에 있던 개는 주인이 먹고 남은 음식을 기다린다. 식사가 끝나고 주인이 음식을 챙겨 개들에게 주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면 밝게 빛나는 별 하나가 보인다. 개가 밥을 바랄 때 나타나는 별, 금성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이다.(귀욥)

 별을 보러 따로 산속으로 더 들어가려 했는데 달의 밝기를 보니 별구경은 조금 힘들 것 같다. 대신 꽉 찬 달빛을 반사하는 호수의 일렁거림을 보며 맥주를 마셔야겠다.

이글이글거리는구나.

출발 드림팀

 아까 공원에 도착했을 때 호수 위 부표에 앉아있는 한 무리의 소녀들을 발견하고는 캠핑을 해도 되는지 확인차 말을 걸었었다.


“안녕~ 혹시 안 바쁘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 어어 뭔데?

“구글에서 보니까 여기 캠핑장이라는데 우리가 텐트를 치고 싶거든. 가능할 것 같아?”

/ 원래 보통 많이들 하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네.. 바이러스 때문에

“그럼 따로 공지나 정책 같은 거 나온 건 없는 거지?”

/어..

“그래 재미나게 놀아 고마워~”


 대충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에 텐트를 치기로 결정 한 건데 주변에 보니 놀이터와 함께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맨발로 돌, 낙엽, 모래를 밟고 지나 외나무다리나 계단을 통과해 결승점에 도달하는 코스가 눈에 익숙했다. 어렸을 때 집 근처 공원에 가면 둥근 황토를 모아둔 씨름장 같은 것이 있었는데 맨발로 들어가면 간지러워 걷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까 그 소녀의 말처럼 원래는 깨나 유명한 캠핑장인가 보다. 현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또 놀러 가야겠다. 그때는 놀러 온 사람들과 음식도 나눠먹고 맥주도 마실 수 있기를 기대하며!


열어줘 제발!

 스트레스를 풀 땐 역시 소리를 지르는 것 만한 게 없다. 기타를 꺼내고 노을을 바라보며 신명 나게 소리치니 기분이 아주 아주 아주 좋아진다.


Ottakringer는 현존하는 맥주중 가장 가성비가 훌륭한 맥주다

 내가 유럽에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맥주다! 난 맥주를 정말 좋아한다. 따로 공부하고 자격증도 딸 정도로 좋아하는데,  비엔나 옆 오타크링(Ottakring)에서 생산되는 이 맥주는 풍부한 홉 향과 우유 따위를 마시는 듯한 부드러움이 미쳤다.  500ml 한 캔에 1유로(1300원) 안팎이니 가격도 정말 착하다. 과거 수도원에서는 단식 기간 동안 빵 대신 맥주를 마셨다고 하니 맥주는 포만감과 영양섭취에 이점이 있어 식사대용으로 섭취 가능하다는 것은 대충 맞다. (물론 매 끼니는 아니고ㅎㅎ)

 무튼 원래 버너와 냄비를 가져와 음식을 하려 했지만 어떤 이유로 챙겨 올 수 없었고 대신 마트에서 산 과자와 빵, 훈제 콩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맥주가 너무 차갑지 않으니 향은 풍부하고 바람이 쌀쌀해지며 동시에 술기운이 올라 따땃해지는 게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아주 훌륭하다. 텐트에 들어와 문을 열고 나란히 앉아 달을 보며 마시멜로를 먹는다. 원래는 불을 피워 스폰지밥과 뚱이처럼 꼬챙이에 구워 먹으려 했지만 불이 없으니 부분 부분 라이터로 그을리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나름 맛있네, 살이 매우 찐다....

짹짹짹 부우우웅

 오늘은 지난번보다 옷을 많이 가져와 조금 덜 춥게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니 역시 새가 울어대고, 멀리 선 기차의 덜컹이는 마찰음이 들린다. 문을 열자마자 선명하게 보이는 어떤 설산의 머리가 태양광을 반사시키고 있다. 이전엔 ‘유럽’이라 함은 아름다운 석조 건물들과 영화 같은 거리에서 마시는 와인이 떠올랐지만 그건 짧은 여행으로 느껴지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알프스를 등에 지고 맞이하는 아침, 조용하고 여유로운 공원에서의 맥주. 이런 것들이 너무나 소중해졌다. 이 낭만적인 삶을 나눌 동반자가 필요하다. 당장이라도 사랑에 빠져버릴 것 같은 곳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공유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아무래도 결혼할 때가 된 건지 요새는 이런 생각들이 많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Österreich] 텅 빈 할슈타트 캠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