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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rip Jun 15. 2020

이상한 나라의 미스타 조


 방금 전 여행자들 그룹채팅에서 누군가 간단한 심리테스트를 하겠다며 글을 올렸다. ‘토끼, 나, 열쇠, 다리’ 네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완성하라는 것이다. 몇몇 문장들이 완성되고 말을 꺼냈던 사람이 해석법을 알려준다.


“토끼는 배우자, 다리는 시기, 나는 ‘나’고 열쇠는 돈이에요!”


그러니까 내 경우에는, 배우자가 어떤 시기에(다리 위에서) 내 돈을 들고 약 올리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뭔 소리지....끄고 잠이나 자야겠다. 순간 요새 늘 하던 그 생각이 또 떠오른 탓에 새벽 3시,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실은 ‘나비, 나, 다리, 별’로 만드는 문장이 먼저였다.)


“나는 나비랑 별 다리에 앉아있어”


 /조 님은 배우자나 여자 친구가 있으신가요?


“아뇨 없습니다”


 조금 예민하게 생각해보니 개인의 어떤 가치를 ‘돈’으로 치환했다는 이유에서 이 테스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가치’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함에는 돈 만한 예시가 없겠다만, 만약 정말 모두가 인정할만한 최정상의 가치가 ‘돈’이라 이리 설정한 것이라면 할 말이 많아진다. (기분이 나쁜 정도는 아니고 그냥 문득 생각나서)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라는 말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왜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이유를 근거와 함께 설명하는 것이 앞선 뻔한 문장보다 조금은 더 설득력 있겠다.


1. 밑밥


인간, 즉 현생인류가 다른 생명체들과 다른 독창적인 특징을 한 가지로만 정의한다면 무엇일까? 어떤 능력으로 인간은 현재의 지구에서 최상위 포식자의 자리에 올랐을까? 지능, 지구력, 투척 능력이나 집단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화 등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사피엔스’의 저자이자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능력’


 

우가우가 A가 우가우가 B와 함께 사냥을 나간다. 언어라고는 물! 고기! 아파!’ 같이 간단한 단어가 전부였던 시절, 그러나 사실상 현재의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지능과 신체능력을 지닌 두 사람이 산속에서 한창 토끼 사냥을 준비 중이다. 너무나 집중한 탓에 다가오는 호랑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우가 B 씨는 결국 호랑이 밥이 되어버렸다. 간신히 살아난 친구 A는 무서움에 헐레벌떡 부락으로 도망쳤고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저기 산! 무서운 동물! B를 잡아먹었어! 위험!’ 아무리 설명해도 평생 호랑이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았고 그런 이들은 주의를 무시하고 산에 들어가 자연스레 호랑이 밥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간이 흘러 호랑이의 존재를 믿은 사람들만이 살아남았고 이 호랑이의 존재는 각색되어 전파되었다. 결국 부락 전체(인간종)의 생존확률이 높아졌고 그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실재하는 것들만 보고 맹목적으로 살아가던 이 집단에게 유례없던 인지적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 능력으로 인해 그 가상의 존재는 때때로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만들고 악을 벌하였으며 하물며 신이 되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는 종교를 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이유다. 생물학적으로 최대 150명까지만 확장 가능한 인간집단의 규모는 침팬지나 오랑우탄과 비교해도 크게 유별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라는 가상의 개념이 수 백, 수 천의 사람을 모으고, 경계하지 않는 신뢰관계에서 서로에게 이점이 될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가상의 개념으로 5천만 명이나 되는 큰 집단을 이루고 사는 것처럼. 이 모든 가상의 개념들이 현재의 인류를 가장 강한 포식자로 만든 무기가 된 셈이다.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살인은 나쁘다’ 나 ‘배려는 착하다’와 같은 관념을 당연하게 따르며 살아가고 있다. 집단의 생존이 곧 개인의 생존이니까.


2. 원숭이와 만원

  다시  이야기로 넘어와서. 돈에 대한 재미난 사실들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려 한다. 얼마  시청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빌렸다.


 지금 눈 앞에 작은 아이만 한 원숭이가 한 마리 있다고 해보자. 바나나를 손에 쥐고 막 껍질을 까려던 찰나 원숭이의 손에서 바나나를 낚아챘다. 배가 고파서 내가 먹으려고.... 바나나를 맛있게 먹고 왜인지 미안한 마음에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원숭이에게 건넨다. 이때 원숭이는 신나서 마트로 달려갈까, 아니면 이빨을 드러내며 나를 후려칠까.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사실 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마트에 가면 바나나 몇 송이는 더 먹을 텐데. 원숭이는 이 돈을 그냥 종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사실 원숭이가 맞고 우리가 틀렸다. 이건 종이가 맞다. 우리가 이 종이로 바나나를 몇 송이나 살 수 있는 까닭은 다름 아닌. 우리가,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인류가 ‘이렇게 생긴 종이는 바나나 몇 송이의 가치가 있다’고 모두가 똑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지난 35만 년 동안 우리가 쌓아온 일종의 알고리즘 집합이며, 이 집합들의 집합체가 바로 인간이다. 종이에 가치를 부여한 건 인간이다. 빨간불엔 멈춰 선다. 내 꿈과 목표를 위해 노력한다. 어린아이는 노동을 하면 안 되고, 사회진출에 특정성별이라는 이유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 수많은, 감히 의심한 적 없는 작은 관념들 마저도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기에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 왔다. 이런 관점에서 우주는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실이고 실제의 의미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극히 쾌락주의적인 설명이지만 그냥... 뭐 사실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교수는 덧붙여 말한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러기에 더 소중하다는 얘기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능력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다. 즉 인간이 부여한 의미를 의미로 두고 지키는 것. 이로 인해 인간은 지금의 인간이 되었다.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우주에서 의미를 부여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며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우리가 생존을 위해 국가를 만들었고 관념을 만들었듯. 원활한 교역을 위해 돈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것들은 오로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간을 돕기 위해, 인간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이므로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 삶이 윤택해지고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만든 수 천 가지의 가치 중 하나 일 뿐이다. 돈이 없으면 힘들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 보통은 그렇다. 그러나 모든 것들을 다 넘어설만큼은 아니다. 수단이 목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지긴 했지만 결론은 이거다. 나중에 아이들이 ‘왜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가요?’라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해줘야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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