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연결, 죽음의 정리
맨 정신으로 글을 쓰는 건 공모전 응모작 ‘밥값’을 제외하고 처음이다. 사실 위스키를 몇 잔 마시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멀쩡한 상태다. 사장의 권유로 터키로부터 남쪽, 레바논의 서쪽에 위치한 사이프러스에 휴가를 왔다. 혼자 온 여행이니 언제나처럼 친구를 사귀려 애썼으나 세계적인 비상사태에 걸맞은 마을의 황량함에 마음을 접는다. 덕분에 <생각하기>에 집중하게 됐고 특히나 오늘, 육체적 활동보단 이것에 몰두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생각들에
오랜 친구와 연락을 했다. 그의 사업과 나의 따분한 ‘행복 전파’로 짧은 대화를 마치고 잠시 멍을 때렸다. 내가 되고 싶던 ‘세계를 뛰노는 여행자’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니 자꾸만 돌부리에 걸린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설정한 20대의 세계여행은 이렇게 무산될 위기에 처해있고, 이에 친구는 ‘다른 애들에 비해 많이 경험했으니 그만 돌아와도 괜찮다. 나이 먹고 돈 많이 벌어 호화롭게 다니자’며 나를 위로한다. 감사한 마음이지만 미안하게도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나는 부유한 여행이 적어도 내게는 지루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지금이 그럼). 또 어떤 이보다 괜찮으니 만족하라는 말은 어쩌면 어떤 이보다 덜떨어지니 정진하라는 의미가 된다. 나는 경쟁하고 싶지 않다. 내가 아쉬운 점은 어떤 이보다 덜 떨이지기 때문이 아닌, 내가 설정했던 꿈을 스스로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내게 진심을 묻기 시작했다.
이 꿈을 꾸었던 순간으로 돌아가 본다. 스스로는 분명 자유의지로 목표를 설정했다고 자만하겠지만 내 얕은 지식으로 본 이 세상에 순수한 의지라는 건 없다(없을 수도 있다. 현재 논란 중. 뇌신경 과학자 벤자민 리벳과 존 딜런 헤이즈는 실험들을 통해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매 순간 보고 듣는 수많은 요인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영향을 주었고, 그에 따른 물리적 결과가 의지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엊그제 보았던 광고의 영향으로 오늘의 나는 무의식적으로 케밥보다 피자를 원할 수 있다. 나는 진심으로 이것을 원하는가. 지난 수년간 당차게 떠들어댔던 확신이 사실은 의지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 히피를 보며 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방금 호텔에 들어오기 전, 마음에 드는 케밥집에 앉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2016년에 출간한 <고양이>를 읽었다. 10여 년 전 <신>을 통해 알게 된 베르베르의 철학적 사고를 이제야 조금 깨닫는다.
주인공 암고양이 ‘바스테트’와 수고양이 ‘피타고라스’가 마침내 사랑을 나눈 뒤 바스테트는 통찰을 한다.
내 안의 모든 것은 공(空)에 의해 나뉜 미세한 물질의 입자에 불과하다. 나는 근본적으로 공(空)과 입자들을 연결하는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내가 나로, 흩어져 있는 구름이 아니라 나라는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게 해 준다. 그런데 이 미세한 먼지들을 공간 속에 배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생각,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는 생각이다.
물리학적으로 일상적인 물질이라는 것은 아주 작은 양의 물질의 존재와 대부분의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물은 화학적으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있다. 전자는 질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데. 원자핵을 농구공 사이즈로 키워 종로에 들고 있다고 가정하면 전자는 강남 주변에 있는 쌀알이다. 이들 사이는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상은 이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물질이 가득 차 있다고 ‘느끼는’ 건 이 전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반발력 때문이다. 이 사실은 x -ray 사진을 통해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에베레스트를 이루는 원자들을 빈 공간이 없도록 압축시킨다면 같은 질량의 돌멩이가 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빈 공간에 존재하는, 특정 영역을 차지하는 에너지의 군집임을 알 수 있다. 2500년전 석가모니가 직관했던 개념과 같다.
이 사고를 조금 더 확장시켜보자. 나와 민들레, 심지어 그 사이에 존재하는 대기조차 사실상 빈 공간이고 우리는 그저 어떤 영역을 차지하는 에너지라면, 우리는 이 에너지를 확장, 전파시킬 수 있다. 이 에너지는 어쩌면 ‘자아’나 ‘의식’ 으로 유지될 수도 있고 다른 객체나 물질은 특정 현상으로 유지될 수도 있다. 이 말인즉슨 나와 민들레는 경계가 불분명하게 연결되어 있고 코끼리, 개미, 인간, 돌, 모든 것 또한 서로 연결되어있다. 위에서 언급한 개인의 자유의지가 실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어떤 영향이라는 전제는 행복이나 사랑을 공유하는 영역, 나아가 모든 생명과 물질은 서로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설명 가능하고 때문에 우리는 이를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내가 행했던 모든 행동들이 나와 연결된 실체라고 여겨지는 에너지의 영역들에 영향을 주고있는 것이다.
원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삶과 죽음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물론 죽음은 삶과 다른 것이고 우리는 이를 인지하고 있다. 동물의 경우, 반려동물이나 가족이 산소호흡을 통해 유기물을 태워 ATP를 생성하는 과정을 정지했을 때 우리는 슬퍼한다. 이처럼 산소는 다른 원소들과 결합해 우리의 몸의 일부가 된다. 그렇다면 산소는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세포들의 집합으로 일어나는 연쇄작용인데 우리 몸에 있는 모든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변경되는 데에는 고작 7년 남짓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면 우리는 매 7년마다 새로운 생명체가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이는 우리의 의식과 관련된 이야기이지만 그 의식을 만들어내는 전기반응또한 우연으로 집합된 원자들의 결과이니 조금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런 물질간에 상호작용에는 지속가능한 어떤 근원이 있다고 생각한다.(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오컬트적인 귀신, 또는 영혼이 아닌 말 그대로 물리적인 에너지의 형태. 입자들이 전자기장에 상호작용하는 힘이나 핵력. 당연하게도 돌이나 책상의 원자들도 이것에 상호작용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식이 있는 영혼의 형태는 아니라 생각함) 그리고 이 작은 에너지들의 군집이 우연으로 생성된 의식체의 다음순간을 '거시적 관점'에서 필연적인 형태로 지속성을 유지한다(랜덤으로 원자가 특정형태(뇌, 심장, 손가락)를 이룸 -> 각 원자가 개별로 갖고있던 에너지(영혼?)와 서로 상호작용 -> 특정 형태와 역할을 유지).
우리는 죽더라도 원자적 관점에선 영원하다. 나의 어머니와 가장 친한 친구는 죽었지만 원자로써 영원히 이 우주에 존재한다. 생명활동을 다한 그들의 육체를 구성하던 원자들은 흙이나 나무, 공기가 된다. 그리고 영겁의 시간이 흘러 이는 다시 누군가의 어머니와 친구가 된다.
죽음이란 우리가 ‘랜덤으로 존재할 수도’ 있는 빈 공간과 에너지의 집합이 단지 배열을 재배치하는 과정일 뿐이다. 물론 죽음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시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주장하는 이야기가 공상일수도 있다. 허나 현재로썬 가장 타당하다고 느껴지는 설명이고 나는 이로 인해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나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를 알고 다시 용기를 얻길 기대한다. 내가 떠내 보낸 사람들은 우주적 시점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나는 약속했던 꿈을 이루는 순간을 보일 것이다. 비록 말이나 손길로 위로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녀가 곁에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내가 행복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다. 충분히 행복하고 난 뒤, 언젠가 웃으며 다시 인사를 할 것이다. 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