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Appenzell
자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됐다. 아이슬란드는 결국 다시 문을 닫아버렸고 모로코는 아예 국경을 열 생각이 없는 듯하다.
해서!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을만한 여행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옆동네 스위스에 다녀왔다.
스위스는 물가가 비싼 편이니 캠핑을 하면 되겠다!
출발 며칠 전부터 설레 괜히 가방을 정리하고 준비한 옷도 입어본다. 태성이가 안 입는다고 줬던 바지를 이제야 입네. 아마존에서 새 침낭과 칼, 우비, 뭐 이것저것 사고 나름 준비도 철저히 했다. 근래 들어 캠핑을 자주 가긴 했지만 아무래도 초보자이니 사전조사가 필요했다. 후에 이 계획은 전부 뒤틀어졌지만....... 덕분에 맘 가는 대로 이것저것 재밌게 놀다 왔다!
아침에 출근해서 열심히 불고기를 만들고 조금 일찍 퇴근했다. 일부러 밤늦게 출발하는 버스를 예약했는데 맘씨 좋은 주방장님께서 오후에 휴무를 넣어주셨네. 호호. 마트에 들러 간단한 레트로트 식품을 사고 채비를 했다. 현재시간 오후 5시 30분, 버스는 밤 11시 45분에 떠난다. 조금 자둬야겠다. 샤워를 하고 맥주를 한 캔 마시고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내가 살고 있는 비엔나에서 스위스 취리히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25분, 버스로는 독일 뮌헨을 경유해 14시간가량 걸린다. 나는 발화제니 부탄가스니 화기가 많아 버스를 타기로 했다. 오랜만에 10시간씩 버스 타는 것도 예전에 종인이랑 했던 여행도 생각나고 재밌을 것 같다. 실은 출발하기 직전 친구들에게서 스위스 정부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한 새로운 정책으로 비엔나에서 오는 여행객을 제한하겠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몇 통 받았다. 걱정이 좀 되긴 했지만 벌써 차도 렌트했고 버스 티켓도 끊었으니 뭐 별다른 수 없이 출발. 늘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새로운 정책은 도착 후 며칠 뒤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럭키가이. 사실 이 시국에 나처럼 여행 다니는 사람들이 바이러스 확산에 기여하고 있겠지만 이에 대해 따로 할 말은 없다. 그냥 뭐. 어쩔 수 없지....
자도 자도 계속 독일... 또 곯아떨어져 자고 잠시 눈을 떴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사람들이 전부 내린다, 도착했나?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확인하니 온통 물이다. 버스에서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보트 위네ㅎㅎ
독일, 리히텐슈타인, 스위스 국경 사이에 있는 Bodensee.
렌터카 회사에 예약한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오후 1시 이후에 대여하는 차량은 가격이 훌쩍 뛰는 바람에 12시에 예약을 하고 12시 20분까지 도착하는 게 계획이었는데 한참이나 늦어버렸다.
/ 그 차 이미 나갔는데? 늦게 오고 전화도 안 받아서 그냥 다른 사람들한테 줬어.
‘이럴 수가,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
/ 원래 12시까지만 렌트해주는 거라서 다른 방법이 없네..
오케이, 이건 내 불찰이니 물이나 한 잔 마시고 나가려는 찰나. 또 다른 직원이 불러 세운다.
/ 잠깐, 다른 지점에 남는 차 하나 있대!
/ 볼보에서 나온 신차고 어제 출고됐어. 40km 탄 신형인데 이거 너 가져가!
ㅎㅎ. 태도가 중요한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더니 운이 좋구먼. 폭스바겐 경차를 1일 18유로에 렌트했는데 늦게 도착해서 1일 150유로에 렌트하는 차로 업그레이드됐다. 세상 감사하게 살아야지.
동쪽으로 3시간. 아펜젤 구역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리히텐슈타인의 어떤 농장에 닭을 사러 갔는데 도축과정 때문에 며칠 전에 미리 이야기해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급하게 차를 돌려 슈퍼마켓으로 갔다. 닭을 사고 아펜젤로 들어서니 이미 오후 6시. 마차가 다니는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바로 어제 출고된 소형 suv로 지나야 한다. 게다가 렌터카이니 스트레스는 배로 증가.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차로 가려고 했던 호수가 실은 도보로만 6시간이 걸리는 거리였고 나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다. 표지판을 보고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2시간이면 도착한다니까 갈만하다.
생각보다 길이 가파름. 힘들다. 운동 좀 할걸. 배낭 무게가 천근이다. 미끌미끌한 바닥을 잘 짚어 걸어다가 작은 오두막 몇 채를 발견했다. 더워진 몸도 식힐 겸 물 한잔 마시고 가야겠다.
주변에 발굽동물이 있다. 야생동물은 대처할 수 없으니 특히나 조심해야 한다. 찾아본바로 스위스에 나를 이길만한 곰이나 늑대는 없는 것 같아 오기로 결정했는데 실은 멧돼지 정도에도 쉽게 사망할 수 있다. 나는 곧 밥을 먹을 예정이고 그러면 동네방네 다 찾아오겠지. 다행히 이는 사슴 발자국들이었고 안심함과 동시에 누가 남겨둔 장작들을 발견했다. + 가만 생각해보니까 사슴도 생각보다 꽤 강한 듯, 제대로 열 받으면 아마 내가 질 거다.
절벽이네. 돌아가야겠다.
사실 등산로만 따라가면 1시간 30분이면 올만한 거린데 빠른 길 찾는다고 까불다가 2시간 반이나 걸렸다.
호수 근처가 온통 진흙이다.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단단한 땅은 여기뿐인 듯. 해가 등 뒤에서 뜰 테니 아침이면 햇빛이 건너편 산에 비쳐 깨나 예쁠 것이다.
반으로 가른 닭에 레몬을 몇 개 썰어 넣고 주변에 돌을 쌓았다. 약 한 시간 정도 돌 위에 불을 지피고 30분 정도 더 두면 다 익을 것 같다.
아까 가져온 나무 몇 개랑 주위에 있는 재료들로 불을 지폈다. 확실히 산 속인 데다가 호수 주변이라 나무들이 죄다 축축해 불이 잘 안 붙는다. 발화제를 좀 써야겠다.
이게 되네? 솔직히 반 장난으로 한 건데 이게 된다. 가방에 챙겨 온 맥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늘 하루, 아니 어제부터, 비엔나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 솔직히 아직도 스위스 호숫가에 앉아 별을 보면서 닭을 굽고 있는 모습이 실감이 잘 안 난다. 여행을 결정하고 실제로 올 때까지 열흘 동안 매일 밤 상상했다. ‘이런 곳에서 이런 방법으로 이렇게 끼니를 때워야지’ 하면서. 수십 시간을 상상하는데 보내고 난 후 실제로 경험하고 있으니 오히려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도 닭을 요리 해먹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관계를 포함한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하고 기본적인 메커니즘만으로도 충분히 작동한다면 그 원리를 깨우치고 난 뒤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응용이 가능하다. 그 원리를 계속해서 배워가는 게 좋은 어른이 되는 길 아닐까.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다보면 결국 답이 나오게 되어있다. 상상을 실제로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고 짜릿하다. 이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하다!
은하수가 흐릿하게 보인다. 호주 대륙을 횡단할 때 봤던 별들에는 비할 바 못되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은하의 바깥쪽을 보고 있는 북반구에서는 중심을 보고 있는 남반구에 비해 은하수가 흐릿하다.
‘이렇게 살아왔으니 이게 정답이야’라는 말은 정말 우습기 짝이 없다. 나는 고집이 세고 누구나처럼 인생철학이 있는 사람인 데에도 이를 강요할 생각은 하나도 없다. 대신 “적어도 나한테는 이런 방식의 삶이 적합하니 나는 쭉 그렇게 할 거야. 혹시나~ 이런 게 마음에 들면 한번 해보자” 의 의미로 글을 쓰고 여행을 다니고 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삶을 비판하거나 반대로 누군가를 오해하며 비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지 않길 바라겠다. 무튼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은 나름 괜찮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을 때의 결과물이 나쁘지 않은데 굳이 내가 아닌 다른 것의 영향 때문에 바꿀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피해가 간다면 조금 고민해보겠지만 당장은 없는 듯하다. 나는 곧 한국에 돌아가고 그에 좋던 나쁘던 영향을 받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까지의 슬로건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감성이 좀 먹히는 것 같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