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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재혁 Dec 15. 2024

꽃 핀 쪽으로 나아갈 것

'소년이 온다'를 읽고

2016년에 한강 작가님이 맨부커상을 수상하자마자, 나는 '채식주의자'를 사서 읽은 바 있다.

하지만 '소년이 간다'에는 왠지 손이 가질 않았다.

왜냐 하면 나는 1980년 5월의 광주 이야기에 알 수 없는 거부감 같은 걸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5시 방향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회피하고싶을 정도로 아픈 역사라 그랬던 건지 나도 정확히 잘 모르겠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겪은 후 11일 동안 뉴스 중독에 빠져있던 나는, 어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후에도 그 어떤 일에도 몰입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시달려야 했다.

탄핵안 가결이 이 사태의 종착점이 아니라 중간 경유지에 불과하다는 자각에 의한 현타인지, 일종의 금단 현상 같은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몇 주 전에 사전예약을 해두었던 신형 맥북 프로를 픽업하기 위해 애플스토어 강남점을 다녀오는 길에 강남 교보에 들렀다.

뉴스 중독에 의한 금단 현상 극복을 위해선 독서만한 게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골라 온 책은 총 4권이었는데, 그 중 3권이 한강 작가님의 책이었다.

'희랍어 시간', '흰' 그리고 '소년이 간다' 중에서 내가 오늘 아침에 집어든 책은 바로, 줄곧 회피 대상이었던 '소년이 간다'였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나는 이미 예감했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겠구나!'

하지만 나는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오늘 하루 만에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서정시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무섭도록 사실적인 문장들은 나태한 일요일 모드였던 나를 시취와 피비린내 가득한 5월의 그곳으로 훅 끌고갔다.

마치 신이 쓴 것처럼 정확한 표현들은 총탄같이 가슴에 박혀 깊이 파고 들었고, 나는 고통인지 감동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무언가에 전율했다.

시점이 돌고 돌다가 소년의 어머니가 화자인 6장에 이르러서는 솟구치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어서 티슈박스를 바로 옆에다 가져다 두어야만 했다.


올해의 노벨문학상은 정말 제대로 주인을 잘 찾아간 듯하다.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원어로 읽을 수 있음에 깊이 감사했다.

그와 동시에, 이 이야기가 다른 나라도 아닌 바로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프고 또 아팠다.

그리고 5월의 광주를 빛이 비치지 않는 쪽으로 밀어둔 채 모른 척 해왔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1980년 5월의 광주가 2024년 12월의 대한민국을 도왔듯 44년 전에 거룩한 희생을 하신 그분들을 위해 나도 뭔가를 하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게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할까 싶은 자괴감에 자못 의기소침해지기도 하지만, 하다못해 이런 결심이라도 해본다.


깨어있을 것.


모른 척 하지 않고 제대로 알려고 노력할 것.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설 것.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 핀 쪽으로 나아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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