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8) 광한루에서 춘향이를 생각하며
오늘은 여행 마지막 날이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숲 속 공기와 새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오전에 광한루에 다시 한번 들렸다가 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흥부골 자연휴양림>을 떠났다.
남원시내 쪽으로 자동차를 달리다 보니 도로표지판에 <용담사>(龍潭寺)란 절이 보인다. 그 아래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도 있다는 표시도 나온다. 급히 차를 돌려 용담사로 들어갔다. 큰길에서 1-2백 미터 정도 떨어진 길로 접근성이 좋다. 용담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건설된 절이라고 하는데, 재정이 그다지 튼튼하지 않은지 잘 관리되어 있지는 못한 느낌이다. 산 아래 평지에 지어진 절로, 7층 석탑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볼 만한 것은 없다.
다시 남원으로 달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광한루 서문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어젯밤에는 문을 닫았던 기념품점과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다. 이곳 남원의 특산물은 목기(木器)와 칼이다. 기념품 가게마다 목기와 칼을 전시해두고 있으며, 그 외에는 일반적인 관광지의 기념품점과는 특별한 차이는 없다. 기념품점들은 계획적으로 지은 상가건물로서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남원의 먹거리라면 단연 <추어탕>을 친다. 언제부터 남원이 추어탕의 고장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서울 곳곳에도 남원 추어탕 집이 많은 걸 보니 어쨌든 남원 추어탕이 좋은 모양이다. 아침을 먹지 않은 탓에 배가 고프다. 더운 날씨에 내키지 않았지만, 집사람의 의견에 따라 추어탕집으로 갔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추어탕이다. 식당에서 광한루 서문까지 거리가 100미터도 채 되지 않은데, 길은 흰 화강암 바닥으로 되어 있어 뜨거운 여름 햇빛을 받으며 걷는 것이 보통 고역이 아니다.
낮의 광한루는 밤에 본 광한루와 다른 느낌을 준다. 어젯밤에 주요 정자들은 모두 둘러보았으므로, 연못 주위를 거닐며 나무 그늘 아래서 산책을 즐겼다. 광한루 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연못에 있는 잉어들이다. 20여 년 전 광한루에 왔을 때는 연못 속에 거의 1미터는 되어 보이는 잉어들이 우글거렸다. 연못에는 지금도 잉어들이 많아 먹이를 주면 모여들지만, 그때에 비해서는 잉어의 숫자도 적고 크기도 작은 것 같다. 검은색의 일반 잉어 외에 비단잉어들도 상당히 많았다.
비단잉어(錦鯉)란 검은색 잉어가 아니라 여러 색이 들어간 잉어를 말하는데, 옛날 중국에서 황실이나 극히 일부 고관들이 이를 관상용으로 길렀다. 이것이 대중화된 것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양식을 하면서이다. 일본의 니가타현(新潟県)의 여러 마을에 가면 비단잉어를 전문으로 양식하는 곳이 많다.
오래전 비단잉어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비단잉어가 알을 낳으면 이를 부화시켜 색깔이 좋은 것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기한다. 성장을 계속함에 따라 이러한 선별 작업이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약 30만 마리 가운데 1마리 꼴이라고 한다. 이렇게 양식된 비단잉어는 세계 각국으로 팔려나가는데, 극상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1마리에 20억 원이 넘는 가격으로 팔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매년 여러 차례 비단잉어 거래를 위한 국제 시장이 형성된다고 한다.
광한루 한 켠에 <월매집>, 즉 춘향이의 집이 있다. 대략 8칸 정도 되어 보이는 초가집인데, 넓은 마당을 가진 깨끗한 집으로, 당시에는 상당한 고급 저택이었던 것 같다. 작은 물레방아가 딸린 조그만 연못이 있고, 대문 옆에는 향단이 방, 따로 떨어진 별채 방은 이 도령과 춘향이의 신방, 그리고 본채에는 월매의 방과 춘향이의 방, 부엌, 마루, 거실 등이 있다. 월매는 퇴기(退妓)라 하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전직 룸살롱이나 단란주점의 마담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 옛사람들의 남녀의 사귐의 타이프는 어떠하였을까? 좋아하는 마음을 가슴에만 간직하고 애를 태우는 <갑돌이와 갑순이> 타이프였을까, 아니면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과감하게 대시하는 <최진사댁 셋째 딸>의 칠복이 타이프였을까?
이몽룡과 성춘향은 만나는 그날 서로 첫눈에 반하여 바로 합방을 한다. 최진사댁 셋째 딸 타이프이다. 이외에도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 그리고 이외의 우리나라 여러 고대소설들을 보더라도 남녀의 만남에서 소위 “밀당”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서로 마음에 들면 바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다. 그런데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을 읽으면, 소년과 소녀는 서로 좋아하면서 말을 못 하고 서로 가슴앓이만 하다가 결국은 소녀의 죽음으로 이별을 한다. 즉 <갑돌이와 갑순이> 타이프이다.
나는 <갑돌이와 갑순이> 타이프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보편적 정서가 아니라 생각한다. 그래서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 이야기도 한국적 정서가 아니라 생각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일본적 정서이다. 일본의 수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 만화들이 이러한 서로 좋아하면서 말은 못 하고 애만 태우는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시집간 날 첫날밤에 달을 보고 우는” 갑순이나 <소나기>의 작은 사랑 이야기가 전형적인 한국인의 정서라 생각할까? 아마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 많은 문화교류를 통해 일본적 정서가 우리들의 정서 한 구석에 크게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정서가 전혀 나쁠 것은 없다. 사람의 생각이나 정서는 항상 변하는 것으로, 시대에 따라 느끼는 마음의 상태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또 옆길로 빠졌다. 암행어사가 되어 변학도의 마수로부터 춘향이를 구한 몽룡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춘향이를 정실로 맞이한다. 이 둘은 행복했을까? 실제로 당시 조선이라는 신분 사회에서 양반집 아들인 몽룡과 퇴기의 딸인 춘향이 결혼을 한다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 현실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소재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치 요즘 TV 드라마에서 재벌의 자식과 일반인들의 결혼이 매우 빈번한 소재로 다루어지는 것처럼.
춘향과 결혼을 한 몽룡은 아마 양반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을 거고, 또 그로 인해 따돌림과 업신여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춘향은 춘향대로 주위로부터 온갖 뒷말과 험담과 멸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 둘이 이런 사회적 압박을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대응했을지도 궁금하다.
한 여름 낮, 내려쬐는 햇빛에 걷기가 힘드니까 자꾸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들이 또 꼬리를 쳐나간다. 광한루 경치도 좋지만 더워서 더 이상 걷기도 힘든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이제 날씨가 더워지고 여행 성수기에 들어가니 한 두 달은 여행을 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