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3) 땅 위의 무릉도원 닌빈
그동안 배낭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항상 장애물 땜에 포기했다. 심한 코골이와 수면무호흡증이 바로 그것이다. 집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양압기(CPAP)란 기계를 사용한다. 코로 공기를 불어넣는 기계인데, 코골이와 수면무호흡증이 완전 해결된다. 1년여 전부터는 의료보험도 되니까 코골이가 심한 사람들은 이를 이용하면 좋을 것이다.
이 양압기란 기계의 크기가 작은 배낭에 꼭 맞는 사이즈이다. 그래서 양압기를 가져가면 어쩔 수 없이 작은 캐리어라도 하나 들고 가야 한다. 그래서야 배낭여행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나는 또 코가 약해 잘 때는 항상 코가 막힌다. 잠을 잘 때 양압기가 없으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무척 괴롭다. 양압기를 가져가기 번거로운 간단한 하루 이틀 여행을 위해 집에 코골이 방지용품을 몇 종류 준비해두고 있다. 이번 여행에는 콧등에 붙이는 테이프를 가져왔다. 허브 향을 이용하여 코 막힘을 뚫어주는 기능을 하는데, 효과가 괜찮은 편이다.
일본에 가면 코골이 방지용품이 많다. 그 가운데는 마우스피스가 있는데, 가격은 3, 4백 엔, 우리 돈으로 3, 4천 원 정도 한다. 사용해보니 조금 불편했고 효과도 신통치 않았다. 몇 주일 전 집사람이 TV 홈쇼핑을 보라고 호들갑을 떨길래 보니 바로 그 코골이 방지용 마우스 피스를 광고하고 있었다. 가격은 무려 40만원. 도둑넘들.....
어쨋던 이번엔 코골이 방지용 테이프에 의존하고 배낭여행을 떠났다. 생각보단 성능이 괜찮은 편이다. 어제저녁 8시에 침대버스를 탔다. 곧 잠이 들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잠자리가 생각보다 편하다. 오랜만에 추위에 떨지 않고 푹 잤다. 버스에는 추운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어컨을 틀어두고 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누가 흔들어 깨운다. 차장이다. 닌빈에 도착했단다. 비몽사몽간에 내리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넓은 도로변이다.
시계를 보니 오전 3시 반. 이대로 횅한 길가에 서있을 수도 없고 멀리 있는 도시 불빛을 보고 무작정 걸었다. 도시로 들어왔지만 문을 연 식당이나 카페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우리나라의 24시간 해장국 집이 새삼 그립다. 그래도 걸으니 추위는 조금 덜하다. 우여곡절 끝에 5시 반쯤 시외버스 터미널을 찾았더니 식당이 한 곳 문을 열고 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 아니 동생뻘 되는 사람이 주인이다, 반갑게 찾아가 쌀국수 한 그릇을 먹고, 오토바이를 빌리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자기가 불러주겠다고 여기서 기다리라 한다.
갑자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오토바이를 빌리기로 한 게 후회가 된다. 조금 있으니 오토바이를 가져다준다. 항무아를 향해 출발했다. 항무아는 하롱베이의 육지판이라 할 수 있는 자역이다. 흔히 하롱베이를 바다의 계림(桂林)이라 한다. 이곳에서는 항무아를 땅 위의 하롱베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걸 간단히 정리하면 <계림=항무아>가 된다. 구글지도 내비를 켜고 항무아를 찾아가는데, 문제는 오토바이에 핸드폰 받침대가 없다는 것이다. 오토바이는 자전거와 달리 반드시 양손을 다 사용해야 하므로 난감하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중간 중간 한 번씩 내비를 보면서 달린다.
부슬비가 얼굴을 때린다. 바람도 세다.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보니까 우의를 입은 사람, 안 입은 사람 반반이다. 비가 더 안 오겠지, 스스로를 위안하며 달린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항무아에 도착했다. 매표소를 바로 앞두고 주차장에서 나온 웬 아줌마가 길을 막아선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으니 여기서 주차하고 가야 한단다. 주차요금은 10만 동. 내가 더 가야 되겠다고 했으나 더 이상 오토바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막아선다. 나도 계속 버티니까 그제야 길을 비켜준다. 항무아 입장권을 사니, 직원이 매표소 마당에 무료로 주차하라고 한다.
항무아, 들어가는 길부터 경치가 예사 아니다.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아마 무릉도원이 있으면 그 입구가 이러리라 생각했다. 주위는 온통 평지 위에 볼록볼록 솟은 산이다. 중국 계림에 가본 적은 없지만 사진에서 본 계람과 흡사하다. 차이라면 계림은 먼 곳에서 보는데, 이곳 항무아는 바로 가까이서 보며, 또 직접 올라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산이 워낙 가파르므로 인공적으로 만든 계단이 없으면 오르기가 불가능하다. 평지에서 20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산에 계단이 놓여 있다. 무척 가파르다. 오르기가 좀 겁이 난다. 젊을 때에 비해 나이가 들어 균형 감각이 많이 떨어졌고, 다리 힘도 약하다. 계단을 오르다가 몸이 뒤로 젖혀지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무리를 하지 않고 차근차근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달라져 갔다.
절경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가 보다. 장가계가 천하절경이지만 항무아는 또 다른 의미에서 천하절경이다. 장가계는 구름을 타고 노니는 산선에 어울리는 경치다. 이에 비해 항무아는 복사꽃이 피고, 개울물이 흐르며, 산수가 물에 떠있는 듯 한 땅 위의 도원경(桃源境)이라 할 만한 풍경이다. 베트남은 물이 풍부하다. 항무아에서는 둥근 산들과 물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산 정상에 오르니 주위가 한눈에 보인다. 그림이나 사진에 나오는 항무아의 대표적인 산수풍경이 눈 아래 펼쳐져있다. 내가 오른 산 정상은 마치 영어의 알파벳 H자 모양의 중간에 해당한다. 산의 양쪽 계곡이 모두 보인다. 한쪽 계곡은 물을 풍성히 담은 논들이 넓게 펼쳐져있다. 다른 쪽 계곡은 물의 고향이다. 산의 사이를 물이 감싸고, 또 그 물 가운데에는 중간중간 섬이 떠 있다. 절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하였다. 코코넛 열매로 목을 축이고 다음 행선지인 짱안으로 간다. 항무아가 산의 절경이라면 짱안은 물의 절경이다. 항무아 정상에서 내려다본 물의 고향이 바로 짱안이다. 이곳은 보트 투어를 해야 그 진경(珍景)을 알 수 있다. 보트는 전체적으로 일원화되어 관리되고 있어, 티켓을 사서 세 가지 코스 중 원하는 하나를 택하면 된다, 대략 3시간 투어 코스이다. 배에는 승객 4명이 타며, 뱃사공은 대부분 여자들이다.
산들이 물 위에 떠 있다. 옅은 안갯속에서 녹색 빛 물 저편으로 산들이 겹겹이 펼쳐진다. 산들 아래로는 동굴이 뚫려있어 배들이 그 속을 통과한다. 물 한 구비, 그리고 산 한구비를 돌 때마다, 그리고 동굴을 통과할 때마다 새로운 절경이 펼쳐진다. 물 중간중간에 섬이 있으며, 이 섬에는 잘 지은 절이나 사당들이 있다. 규모도 상당히 크다. 옛날 베트남의 건축기술도 상당했던 것 같다. 섬에서 내려 구경을 한 후 다시 배를 탄다. 코스가 아주 아기자기하게 구성되어 있다.
투어링 코스로는 아주 그만이다. 이런 절경을, 이렇게 좋은 위치에서, 이렇게 효율적으로 감상한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다. 그렇지만 근 세 시간을 쉴 틈 없이 노를 젓는 여자들은 보통 힘든 게 아닐 것이다. 안쓰럽다. 그렇지만 모두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간다면 분명 베트남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동남아 국가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구걸하는 사람들, 베트남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젊은이들이 할 일 없이 무리무리 지어 빈둥거리는 모습도 못 보았다.
다음 목적지는 고대 수도(Ancient Capital)이다. 가는 길이 절경이다. 산과 산 사이로 난 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간다. 도로는 잘 닦여져 있다. 이곳은 명승지를 따로 지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지역 전체가 절경이다. 오토바이를 렌트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동성이 좋으니까 효율적인 관광이 된다. 고대 수도 앞에 도착하니 시간이 어중간하다. 들어가서 관람을 하면 시간상 이곳 닌빈에서 묵어야 할 것 같다. 입장을 하지 않고 밖에서 대충 둘러보았다.
이젠 추운 건 싫다. 하노이의 조금 좋은 호텔들을 검색해보니 대개 난방시설을 갖추고 있다. 약 15년 전 11월 말경 타이완에 가서 아주 고급 호텔에 들어갔는데, 난방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고생한 적이 있다. 난방 면에서는 하노이가 타이베이보다 나은 것 같다. 추위로부터 몸을 녹이기 위해 하노이로 가야겠다. 오토바이를 반납하고 하노이행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돌아왔다. 터미널 근처에서 순경들이 주로 외국인들 대상으로 오토바이 단속을 벌이고 있다. 아마 대부분 무면허 운전이니까 그러리라. 나는 다행히 다른 사람이 단속되는 틈에 무사히 도착했다. 귀국하면 반드시 이륜차 면허를 따야겠다.
아침을 먹었던 식당에서 돼지 족발과 함께 밥을 먹었다. 춥고 피곤하다 보니 독한 술을 한잔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간 베트남 식당에선 모두 맥주밖에 없었다. 15년 전에 왔을 때는 베트남 보드카라 해서 소주 비슷한 술이 있었는데 이번엔 보이지 않는다. 식당 주인에게 독한 술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소주 마시는 시늉을 해 보이고 "카~"하니 알았다고 하면서 꼬불쳐 둔 술을 꺼내 준다. 역시 손짓 발짓은 만국 공통언어이다. 생수병에 담은 술인데, 오미자 향이 난다. 소주보다 조금 약하다. 그렇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이 정도도 만족이다.
15년 만에 와보는 하노이.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오토바이 택시 운전사들이 벌 때 같이 달려든다. 무지 복잡하다. 사람과 택시, 버스, 오토바이가 뒤엉켜져 난리도 아니다. 예약 호텔의 위치를 찾아봤다. 여기서 40킬로 떨어진 곳이다. 하노이 시 외곽에 있는 호텔인 모양이다. 이래선 불편해서 안된다. 예약을 취소하고 다시 중심가 호텔로 예약했다. 여기서 8킬로. 복잡해서 택시를 잡을 수 없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젊은 오토바이 운전수에게 호텔까지 얼마냐고 물었다. 20만 동이라 헌다. 재빨리 그랩 택시를 검색해봤다. 9만 동으로 나온다. 그랩을 보여주며 "10만 동 OK?"하니 좋단다. 그랩은 이렇게 가격의 기준점이 되어 편리하다.
오토바이 택시가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도 했으나, 나도 오늘 하루 종일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다녔고, 또 이 친구가 나보다 분명 운전도 훨씬 잘할 것이므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오토바이 택시는 복잡한 하노이 거리를 이리저리 잽싸게 빠져나오며 나를 호텔로 데려다주었다. 복잡한 골목 안에 있는 조그맣지만 아늑한 호텔이다. 방이 추우면 묵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더니 전기난로를 가져와 따뜻하게 해 준다.
먼저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했다. 아제 살만하다. 몸이 따뜻이 녹는다. 당초 내일 하롱베이 여행을 하려 했으나 하루 연기했다. 내일은 이곳에서 느긋이 쉬어야겠다. 거리로 나가니 불야성이다. 노점에서 쇠고기, 돼지고기 구이에다 맥주 두 병을 마시고 나니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 자야겠다.
(계속)
2019.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