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 닷새도 안되었건만 어느 도시가 어땠는지, 무엇을 봤는지,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이가 드니 기억력이 점점 감퇴하는 것 같다.
은퇴 후에 블로그와 브런치를 만든 후, 여행을 하거나 영화를 보면 꼭 기행문이나 영화감상문을 쓴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쓴 기행문은 약 400편, 영화감상문은 1,300편이 넘게 되었다. 이전에는 영화제목을 보고 봤는지 안 봤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는 이전에 본 영화를 다시 보면서도 긴가 민가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영화감상문을 쓰고부터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지금도 감상문을 쓴 영화는 제목만 들으면 대략의 스토리가 거의 또렷이 기억난다.
기행문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그날 저녁에 그날의 일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날 쓴 글은 바로 페북에 올린다. 그런데 여행 중에 쓰는 글은 태블릿 PC나 휴대폰으로 쓰기 때문에 불완전한 경우가 많다. 팩트를 확인하는 일에 소홀하다든지, 참고자료를 검색하기가 귀찮다든지, 타이핑을 하는데 짜증이 난다든지하여, 나중에 보면 아무래도 불완전한 문장과 글이 많다. 휴대폰으로 쓴 글과 PC로 쓴 글을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어제부터 유럽여행 중 쓴 기행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약 40일 동안 쓴 글의 분량이 200자 원고지 환산 약 900매가 된다.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이다. 기행문을 다시 읽으니 여행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맞아 여긴 이랬지, 그때 이런 일이 있었지" 기억이 소록소록 되살아난다. 부족한 부분이 발견되어도 최소한으로 손을 대었다.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하면 시간이 한정 없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현장감을 오히려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행문을 다시 정리한 후 사진과 함께 한편씩 블로그와 브런치에 포스팅을 하다 보면 여행의 기억은 완전히 되살아난다. 이렇게 하여 얻어진 기억들은 웬만큼 시간이 지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완전한 나의 기억이 되는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기행문을 쓰다 보면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무료한 시간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차를 기다린다든지, 줄을 선다든지, 저녁시간에 할 일이 없다든지 하여 무료한 시간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 시간에 기행문을 쓰면 되니까 지루할 틈이 없다.
대신 저녁시간이 없어진다. 보통 기행문의 길이는 하루 200자 원고지 환산 20매 정도가 되는데, PC로 타이핑하면 20~30분이면 끝날 일을 휴대폰이나 태블릿 PC로 하다 보니 두세 시간은 걸린다. 중간에 통신장애라도 발생하면 4시간 이상 걸리는 날도 있다. 이 때문에 저녁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다. 이번에도 40일 여행을 하면서 TV를 한 번도 시청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기행문 쓰기 취미는 괜찮은 것 같다. 여행을 즐기고, 그것을 글로서 한 번 더 우려먹고, 완전한 여행기억까지 저장할 수 있으니 꽤 유용한 취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