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3a) 칭다오에서 둔황까지- 중국 횡단여행 (22)
9시간의 긴 여행 끝에 드디어 둔황에 도착하였다. 둔황은 내게 있어 항상 가보고 싶은 미지의 땅이었지만, 그동안 가볼 생각조차 못하였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은 신장(新疆) 지역에 외국인 방문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둔황도 통제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고 아예 여행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30년 전쯤인가, 일본 NHK가 제작한 "실크로드-로마로 가는 길"과 국내 방송국이 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둔황>(燉煌)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 언젠가는 꼭 한번 찾아가고 싶은 상상 속의 땅이라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 프로그램을 시청한 수많은 사람들이 아마 그랬을 것이다. 워낙 대히트를 쳤던 다큐멘터리라 50대 이상이라면 지금도 그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오늘 바로 그 둔황에 왔다. 내 상상 속의 둔황은 사막 속의 낡은 역사를 내리면, 모랫바람이 날리는 저 멀리, 황토와 돌로 만든 인가가 드문드문 서있는 그런 외딴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항상 배반당한다. 힐링과 성찰의 땅이라 생각했던 베트남의 사파는 밤이 되면 화려한 조명아래 유흥과 환락이 지배하는 환락의 도시로 변한다. 둔황도 과거의 외딴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가 아니라 현대적 도시로 변해있었다.
둔황에 대해서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둔황은 실크로드와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이다. 실크로드(Silk Road)는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양 세계를 연결했던 광대한 교역로 네트워크를 통칭하는 명칭이다. 이는 단순한 무역로를 넘어 문명 교류의 대동맥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실크로드는 하나의 고정된 길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복잡한 경로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상 실크로드, 초원길, 해상실크로드 등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루트가 육상 실크로드이다. 육상 실크로드는 시안에서 출발하여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둔황(敦煌)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오아시스 도시들(사마르칸트, 부하라 등)을 지나 서아시아 및 지중해 연안(로마, 이스탄불 등)까지 이어진 길이다.
실크로드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 시대에 외교관이자 탐험가였던 장건(張騫)의 서역 원정으로 본격적인 교역로의 기틀이 마련된 이후, 약 15세기 중반까지 동서양의 교류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에서는 주로 비단, 도자기, 차, 종이, 인쇄술, 화약, 향신료 등이 서방으로 건너갔다. 서방에서는 유리그릇, 금, 은, 보석, 말, 포도, 석류, 호두 등의 작물, 향신료 등이 동방으로 유입되었다.
실크로드는 상품무역뿐만 아니었다. 동서방의 문화가 교류되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까지 전파되었다. 또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경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동서로 전해졌다.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미술 양식이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전해지며 둔황의 석굴 예술 등에 영향을 미쳤다. 서방의 유리 제작 기술이나 동방의 제지술 등이 교류되어 각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한다.
둔황은 중국 감숙성 북서부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고대 중국의 장안(長安)에서 서역으로 나아가는 실크로드 육로의 핵심적인 관문 역할을 수행했다. 둔황은 실크로드의 남쪽 길과 북쪽 길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동서 교역의 유일한 통로 중 하나였다. 이곳에는 한나라 때 서역 진출의 관문 역할을 했던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이 설치되어 군사적,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둔황은 대상(隊商)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비단, 도자기 등의 중국 물품과 포도, 호두, 유리 등 서역 특산물이 오가던 대상(카라반) 무역의 주요 정박지이자 보급 거점이었다.
둔황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는 주요 경로였다. 수많은 구법승(求法僧)들이 이곳을 왕래하며 경전과 불교문화를 들여왔고, 이는 둔황의 문화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불교 예술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막고굴을 그 대표적 유산이다. 둔황의 상인과 토호들은 부처의 가피를 얻고자 명사산(鳴沙山) 동쪽 절벽에 막고굴(莫高窟)이라는 대규모 석굴 사원을 조성한 것이었다.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바로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지금 둔황은 인구 19만 명의 도시라 한다. 도시의 규모에 비해 역사는 상당히 컸다. 택시를 타고 시내에 위치한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둔황 시가지에 들어간다. 화려한 도시의 조명이 우리를 반긴다. 도로옆의 가로수들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와 같은 화려한 조명 전구로 장식되어 있다. 이 불빛을 뚫고 지나가면 눈부신 조명으로 장식된 건물들이 나타난다. 도시 전체가 불빛의 물결로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시내 중십가는 그야말로 사방이 화려한 조명이다. 그 속에서 교통체증은 대도시를 능가한다. 온갖 종류의 차들이 서로 엉겨 아비규환이 되기도 한다. 내 머릿속에서 상상의 도시였던 둔황은 이처럼 새로운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
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은 중심가와 떨어진 시내 변두리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1박 7만 원에 예약하였는데, 초라한 느낌이 든다. 좀 오래된 호텔인 것 같고, 방도 그다지 깨끗하지 못하다. 침대 시트도 세탁은 잘 되어 있지만 상당히 낡았다. 게다가 샤워실에는 수건이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일회용 종이타월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호텔에 투숙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예약 플랫폼인 트립닷컴에 일박만 숙박하고 나머지는 취소할 수 없느냐고 문의하니, 체크인한 후에는 무료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이곳에서 5박을 할 수밖에 없다.
벌써 밤 9시가 가까워온다. 아직 저녁도 못 먹었다. 식사를 하러 나갔지만 근처에는 그럴듯한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호텔 옆에 작은 우육면 집이 있다. 그야말로 로컬 식당이다. 들어갔더니 좀 심술궂게 생긴 주인 녀석이 퉁명한 목소리로 영업이 끝났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근처 작은 슈퍼에서 우육면 컵라면을 샀다. 호텔에 들어와 뜨거운 물을 부어 먹으니 꽤 맛이 괜찮다. 아주 얼큰한 맛인데, 우리나라 라면의 얼큰함과는 다른 얼큰함이다. 술 마신 다음날 해장으로 먹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 와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이 고층아파트이다. 우리는 그동안 중국 국내 도시 간 이동을 거의 고속철에 의존하였다. 고속철 역사는 대개 시 외곽에 있다. 그곳에 새로운 신도시가 조성되는지 고속철 역사 부근에는 어느 도시에서나 고층아파트가 건설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파트 건설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큰 단지 들이다. 어떤 곳은 허허벌판 아무것도 없는 곳에 고층아파트만 올라가고 있다. 드넓은 빈터에 넓게 뚫린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사방에서 아파트만 올라서고 있는 것이다. 눈대충으로 얼른 층수를 세어보니 대략 40층 내외의 건물이 많은 것 같다. 비단 신도시만 그런 것이 이니다. 구도심에서도 여기저기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난주에서 둔황으로 가는 도중 기차는 소도시에 수시로 정차한다. 거의 모든 도시에서 역 주위에 거대한 고층아파트 숲이 조성되고 있었다. 정말 지어도 엄청나게, 어마어마하게 많이 짓는다.
우리나라에서 여행을 하다 보면 시골 도시에 대단위 고층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경우를 본다. 중국은 더하다. 정말 주위에 인가라고는 전혀 없는 지역에 수십 동의 고층아파트만 올라가는 광경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저런 곳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