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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Oct 31. 2021

평창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여행(2)

(2021-10-13 b) 영월- 단종의 무덤 장릉과 장릉을 지키는 사찰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햇볕이 따갑다. 평일이라 그런지 관광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넓은 청령포 주차장에는 몇 대의 차만 주차되어 있다. 청령포에서 나와 자동차로 5분 남짓 달리면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이 나온다.


이곳 장릉에 대해서는 기구한 사연이 전해 내려온다. 단종은 사약이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사약을 마시지 않으려고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단종이 죽자 그 시신을 영월의 동강(東江)에 버렸다고 한다. 그 버려진 시신을 지역의 말단 관리인 엄홍도란 사람이 수습하여 이곳에 암장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키면서 무덤도 능으로 격상되어 장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시신을 수습한 엄홍도에게도 그 공을 기려 공조판서의 벼슬이 추증되었다고 한다.


2. 단종의 무덤 장릉(莊陵)


장릉 입구를 지나면 먼저 단종 기념관이 나온다. 기념관에는 단종의 생애에 대한 여러 기록들과 당시의 풍습, 제도 등이 설명되어 있다. 세자의 교육, 세자의 하루 생활,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기록과 이야기들 등 단종에 관련된 이런저런 자료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단종이 죄인으로서 죽은 만큼 그와 관련된 직접적인 유물이 없는 때문인지 관련 유물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이 좀 아쉽다.


단종은 세종대왕의 장손이자 문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인 문종이 죽자 불과 12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숙부 수양대군의 위세에 눌려 겁에 질려 살다가 결국은 17살의 어린 나이에 숙부의 손에 죽었다.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을 생각하면 개인으로서는 가슴 아프 일이지만, 다른 각도에서는 이것은 권력투쟁의 결과이므로 좋다 나쁘다의 관점에서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준 후 상왕(上王)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박팽년,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에 의한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면서 세조는 그 책임을 물어 그를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단종의 숙부이자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노산권 복위 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되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죽이고 노산군도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죽인 것이다. 세조로서는 아마 단종이 직접 자신에 대한 모반을 도모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알았겠지만, 그가 살아있는 한 언제든지 누군가가 단종을 내세워 자신에게 모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화근을 미리 제거한다는 차원에서 단종을 죽였을 것이다.


사육신이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단종도 그렇게 일찍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단종을 위한다는 사육신과 금성대군의 선의(善意)가 오히려 단종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면 좋은 뜻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실감 있게 들려온다.

전시관 한쪽에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에 관한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시습이란 인물에 대해서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은 의문이 있었다. 잘 아시다시피 김시습은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알려진 사람으로서, 그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결고 그로부터는 녹을 먹을 수 없다고 하여 평생을 벼슬을 멀리하고 방랑 생활로 일생을 보냈으며, 우리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곧은 절개를 찬양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세조의 무도한 행동에 반감을 가져 관직을 가까이하지 않고 세상을 염세하며 평생을 떠돌아다녔다면, 그의 글에는 세조의 악행이나 잘못된 세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어야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의 대표작이라 할 <금오신화>는 로맨스 소설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판타지 애정소설로서, 요즘 기준에서도 상당히 농도가 짙은 내용이다. 당시로서는 거의 19금 급에 해당하는 소설이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다른 글에서는 그가 세상을 비판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금오신화>만을 읽어 본 소감 만으로는 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어릴 때 김시습의 전기를 읽은 적이 있지만, 거기에도 세조의 잘못을 꾸짖고 잘못된 세상을 한탄하였다는 글을 썼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예 세상 일에 등을 돌렸는가? 현실에 절망하고 있지만 정치적 탄압을 피하려는 작가들이 “순수문학”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과 같은 일이라 생각하여야 하나...       


기념관을 나오면 한쪽에 제단이 준비된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이곳은 배식단(配食壇)이라 하는데, 처음에는 한자 뜻만을 보고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설명서를 보니 이곳은 단종에 대한 제사와 함께 장릉에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제단이라 한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이름을 음식을 나누어준다는 의미의 배식단으로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단종의 무덤은 배식단 뒤 쪽에 있는 높은 언덕 위에 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식단을 나와 언덕으로 통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나무 계단을 오르면 무덤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길이 이어진다. 무덤은 왕릉이라 생각하기엔 좀 소박하다고 할까 초라하다는 느낌도 있다. 물론 일반인들의 무덤에 비해서는 훨씬 좋은 건 틀림없지만, 서울 근교에 있는 다른 왕릉들과 비교하면 확실이 소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덤 양 쪽에는 두 개의 문인석(文人石)이 서있고, 그 외에도 몇 개의 작은 석상들이 놓여져 있다.


단종의 능이 있는 언덕에 오르면 바로 아래에 배식단의 정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저 멀리 강원도의 아득한 풍경이 펼쳐진다. 오늘은 맑은 가을날 구름이 점점이 떠있는 하늘은 더없이 푸르다. 오랜만에 이렇게 맑은 가을 하늘을 보는 것 같다. 이곳 언덕과 가까운 곳에서 이어지는 푸른 숲의 세계, 그리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저 멀리 서있는 산의 모습이 청정지역 강원도의 본모습이라 할 것이다.  

최근에는 드라마 <설중매>나 <한명회> 등 단종과 세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들이 많이 제작되어 사람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이 사건들을 바라볼 있었겠지만,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책보다는 작가 이광수가 쓴 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를 통해 이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나도 중학교 때인가 <단종애사>를 읽은 적 있는데, 이 소설은 단종과 사육신에게 동정을 보내며, 세조와 그를 도운 한명회 등은 아주 악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계유정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상당히 획일적인 면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이를 대하는 시각이 사람들에 따라 다양해진 것 같다.


3. 장릉을 지키는 사찰 보덕사(報德寺)


장릉을 나와서 보덕사로 향하였다. 보덕사는 장릉에서 1킬로도 못 미치는 거리에 있어 차로 2, 3분이면 도착한다. 장릉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라 하며, 당시에는 지덕사(旨德寺)라 하였다고 한다. 의상대사는 정말 절을 많이 지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이곳으로 유배 와서 죽어 이 근처에 묻히자 이름을 노릉사(魯陵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설명을 보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단종이 죽은 후 앞에서 언급한 엄홍도란 사람이 그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암장하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버려진 무덤을 어떻게 호위한다고 노릉사란 이름을 붙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물며 감히 왕의 무덤이란 뜻의 능(陵) 자를 써서 세조의 비위를 거슬리지나 않았을지 모르겠다.


보덕사는 크지 않는 사찰이지만, 편편한 평지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절은 숙종 기에 단종이 복권된 후 장릉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지정되면서 보덕사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넓은 평지에 대웅전의 역할을 하는 극락보전에 서있고, 그 옆으로는 산신각, 심검당, 칠성각 등 보조 건물이 세워져 있다. 평지에 세워진 절이라 그런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느낌이 든다.

보덕사는 절 건물이 대부분 비교적 최근에 건립한 듯 보이고, 또 영월 시가지에서 가까운 평지에 위치한 절이기 때문에 건물 자체에는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마음을 끄는 것은 두 그루의 나무였다. 하나는 절 입구에 위치한 느티나무로서,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키는 하늘을 찌를 듯한데 몸통 줄기의 반 이상이 인공의 수지로 메워져 있다.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왔는지는 그 그늘이 주위를 온통 덮을 듯 보인다. 다른 한 그루의 나무는 대웅전 옆에 서있는 향나무처럼 보이는 나무로서,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향나무보다 큰 나무다. 완벽하게 균형이 잡인 나무가 보기에도 늠름하게 절 마당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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