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여행(2): 책임이란 것
(2017.03.22) 키안 곶 단애 위에서
일본에서는 11세기부터 16세기 말까지 근 600년간 전란이 계속되었다. 자기들끼리 끊임없이 지지고 볶는 내전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외국 군대에 의해 국토가 침공당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3-4세기경 일본이란 나라가 세워진 이래 일본이 외국군과 일본 국토에서 전쟁을 벌인 사례는 딱 3번 있었다. 바로 몽고 침공, 고려 및 조선의 대마도 정벌,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때의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시대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초반에는 일본군이 크게 패했지만 폭풍이라는 자연의 도움을 받아 일본이 대승했다. 1차 침공 시에는 약 4만의 몽고, 고려 연합군 가운데 절반이 불귀의 객이 되었지만 일본군 사망자는 1,000명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2차 침공 시에는 더욱 심해 15-20만의 몽고, 고려 연합군 중 2/3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으로 인해 일본의 타격도 커 카마쿠라(鎌倉) 막부가 무너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은 여몽 연합군을 패퇴시킨 폭풍을 신이 일본을 구하기 위해 보낸 바람이라 하여 신풍(神風), 즉 <카미가제>라 하였다.
고려 말에서 조선 세종대왕에 이르는 3번의 대마도 정벌은 일본에게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대마도란 섬 자체가 지금도 인구 5만이 안 되는 조그만 섬이다. 그 당시는 잘은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인구 만 명 남짓이었을 거다. 그러니 군사라 해봤자 많아야 몇 백 명에 지나지 않았을 거다. 그런 섬에 조선군 수 천 명이 쳐들어 갔으니 원래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다.
조선군이 쳐들어오자 일본군은 모두 산으로 도망가 버렸고, 또 조선군으로서는 지리도 잘 모르는 곳에서 적병을 추격하여 무작정 산으로 쫒아 갈 수도 없어 그렇게 전투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전과라 해봤자 별 것도 없었다. 또 대마도는 그 당시 일본에서도 자기네 땅인지 긴가 민가 하는 관심 밖의 땅이었다. 지금의 일본인들로서도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관심 밖의 사건이다. 아마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조차도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이었다. 제2차 대전 말기 일본의 전쟁 방식은 미국이라는 서양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방식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궁지에 몰린 일본,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최고 군통수기관인 대본영(大本營)은 통상의 전쟁 방식으로는 이길 희망이 없자 특수공격부대를 만든다.
이름하여 특수공격부대, 줄이면 특공대(特攻隊),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독고다이>. 중국 무협소설식 표현이라면 동귀어진(同歸於盡), 바로 너 죽고 나죽자는 자살 공격조이다. 일본에서는 이 특공대, 즉 독고다이를 카미가제(神風)라 불렀다. 최후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신이 보낸 바람이라고...
그러므로 <독고다이>란 바로 자살공격조인 카미가제를 의미한다. 중동에서 가끔 발생하는 자폭 테러의 원조라 할 수 있다. 항공기가 군함을 공격할 때는 보통 폭탄을 투하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성공률이 떨어지니까 독고다이는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비행기 채로 적함에 돌진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고다이로 출전을 하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제로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혼자서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즉 독불장군의 뜻으로 <독고다이>란 말을 쓰는데, 이건 잘못 알고 있는 거다.
어떤 전쟁이든 그 정당성에 관계없이 전쟁이란 전쟁 목적이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독고다이란 것은 사람 죽이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 방식이라는 거다. 여기에 미군은 적지 않게 당황하였다.
태평양에서 맥아더 원수가 지휘하는 미군은 상륙작전을 통해 일본군이 점령한 섬들을 차례차례로 탈환하며 진격해온다. 일본의 대본영은 각 섬의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명령을 내린다.
“절대 후퇴해서는 안된다!!”
“항복을 해서도 안된다!!”
“포로가 되어서도 안된다!!”
“도저히 사정이 안 되면 사무라이가 절복(切腹, 셋뿌쿠)을 하듯이 옥쇄(玉碎)하라!!”
일본군들은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개죽음을 마다 않고 저항했다. 이로 인해 미군은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사이판에서, 그리고 이오지마(유황도)에서 미군은 끝까지 발악하다시피 저항하는 일본군을 제압하고 오키나와를 목전에 두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태반이 전투 중에 사망하고, 또 자살하고 해서 대다수가 개죽음을 당하였다. 드디어 일본 영토인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하자 대본영은 다시 명령을 연발한다.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죽어라. 죽음으로 오키나와를 지켜라. 그러나 역부족으로 오키나와의 방어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자, 다시 대본영은 전군에 불명예스럽게 포로가 되느니 전원 옥쇄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민간인들에게도 미군에 잡혀 고문과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옥쇄(玉碎), 즉 자살하라고 끊임없이 명령하고 세뇌하였다.
막다른 길에 몰린 일본군은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지하의 해군사령부 벙커에서 사령관 이하 4,000천 명의 병사 전원이 자살한다. 어떤 넘은 수류탄을 안고, 어떤 넘은 총대를 물고 방아쇠를 당겼고, 또 어떤 넘은 대검으로 배를 가르며 그렇게 죽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패잔평들과 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민간인들로 이루어진 약 만 명의 사람들은 미군을 피해 계속 도망을 쳤다.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 쫒긴 이들은 천애 절벽으로 이루어진 오키나와의 남쪽 끝 키얀곶까지 도망을 쳤다.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들은 살아서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키얀곶의 단애 위에서 몸을 던졌다. 그중에는 죽기가 싫었지만 다수의 위압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자살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대본영의 명령과 세뇌에 의해 이렇게 만 명의 사람들이 자살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 가운데는 많은 조선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일부 패잔병과 민간인은 미군에 투항하였다. 이들은 대본영의 말과 달리 미군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 그 키안곶의 단애 위에 섰다. 여기서 수많은 인명의 아무런 의미 없는 죽음, 이를 초래한 국가범죄, 그리고 그 책임 문제를 생각해본다.
오키나와 점령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일본은 항복을 하였다. 미군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고, 최고 군통수기관인 대본영은 점령군에 의해 접수되었다. 본토에 상륙하기 전 미군은 극도로 긴장하였다. 사이판, 이오지마, 오키나와 등에서 벌어진 그 악몽 같은 전투를 생각하면, 본토에 상륙하면 얼마나 처절한 전투가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왠 걸, 막상 상륙을 하고 보니 싱겁게도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항복보단 자살을 택하겠다고 악귀같이 달려들던 일본군들이 본토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분고분 모두 다 점령군에게 순종하였다.
병사들에게 그리고 민간인들에게 전사와 자결을 독려하던 대본영. 그 군부의 고위간부들 가운데 전쟁에 졌다고 자살을 하는 넘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병사와 민간인들을 자살로 내몬 명령을 내린 넘이 아무도 없다는 거다. 분명 대본영의 이름으로 죽음의 명령이 수도 없이 내려졌는데, 구체적으로 그 명령의 주체가 되는 넘, 거기에 책임이 있는 넘이 아무도 없다는 거다.
일본 대본영의 명령에 의해 벌어진 전쟁, 몇 천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어디 인도적인 전쟁이 있겠냐마는 태평양전쟁은 그 잔인성이 극에 달했다. 일본군 최고사령부인 대본영은 전쟁 상대방은 물론 민간인, 심지어는 자국민들에 까지 인간으로서는 못할 짓을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책임이 있는 넘이 아무도 없다는 거다. 물론 전범재판에서 몇몇이 처형되기는 했지만, 포괄적인 전쟁책임을 물은 것이지 자살 명령과 같은 구체적인 명령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은 아니다.
그럼 이러한 국가범죄의 무책임성은 일본만의 특징인가? 아니다. 모든 국가범죄, 권력범죄의 공통적 특징이란 생각이 든다. 킬링필드로 자기 국민들 1/4을 학살한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은 바뀌었지만 지금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남의 나라 일만도 아니다. 우리 주위에도 흔히 본다. 많은 사건에서 위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어 명령에 따랐을 뿐 자기 책임은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런데 막상 문제가 생기면, 그 위에는 아무도 없다. 요즘 방송에서 매일 접하는 일이다.
귀국 하루 전날 저녁, 오키나와 최남단 키얀곶의 단애 위 평화기념공원에서 책임이란 것에 대해 이렇게 헛된 생각을 해본다.
2017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