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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Aug 12. 2022

임진왜란(4): 일본 수군의 전력

수군 장수들과 병력수, 그리고 함선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해온 왜군 가운데 수군의 전력을 살펴보자. 


왜의 수군 병력은 모두 8,750명이었다. 수군도 육군과 마찬가지로 8명의 영주들의 연합군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영주 별 동원 병력수와 그들 영주들의 세력을 곡식 산출량, 즉 고쿠다카(石高)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쿠키 요시다카(九鬼嘉隆, 수군 대장): 1,500명(3.5만 석)

토도 다카도라(藤堂高虎): 2,000명(2만 석→5만 석)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00명(3만 석)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 1,000명(1.5만 석)

칸 미치나가(菅達長): 250명(1.5만 석)

쿠와야마 카즈하루(桑山一晴): 1,000명(2만 석)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氏善): 850명(3.2만 석)

스기우치 덴사부로(杉若伝三郎): 650명(1.9만 석)


수군으로 참전한 영주들은 육군과 달리 대부분 군소 영주이다. 그런데 이들의 세력을 보면 대개가 3만 석 내외의 고만고만한 영주들로서, 대장이라고 해서 다른 영주들을 압도할 힘이나 권위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래전에  방영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수군 대장인 쿠키 요시다카가 다른 장수들을 부하 다루듯이 심하게 윽박지르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는데, 아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와키자카를 이순신의 라이벌로 등장시켜 드라마를 그와 이순신의 라이벌 구도로 끌고 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순신과 와키자카가 선상에서 서로 칼을 뽑아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왔는데, 당시 그것을 보고 어이없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순신과 일개 작은 영주에 불과한 와키자카를 라이벌로서 동급으로 놓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할 것이다. 조선침략 왜군 장수들의 서열을 매긴다면 와키자카는 랭킹 100위에 들까 말까 한 정도일 것이다.     

일본 수군

이들 영주들은 대개가 해적(海賊) 출신이었다. 아니 이들이 모두 왜구들이었다고? 이렇게 반문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말하는 해적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바다의 도둑 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섬나라라서 옛날부터 바다를 근거지로 하는 해상세력이 많았다. 대부분의 영주들은 그 경제력의 터전을 땅, 즉 농업에 두고 있었지만 이들 해상세력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해상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자기 지역을 지나는 상선이나 수송선으로부터 세금을 걷는 대신 이들을 호위해 주거나, 직접 운송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약탈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바다에 근거를 둔 작은 영주들을 해적이라 일컬은 것이었다. 중국 무협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표국과 비슷한 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오나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이들을 크게 한번 이용한 후 세상을 어지럽힌다 하여 엄중히 단속하였으며, 무장을 거의 해제시켜 버렸다. 그래서 이후 해상세력은 크게 힘을 잃었다. 이런 상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 당시까지도 이어졌다. 그리고 조선 침공 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참전한 수군들도 대부분 보급품의 수송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에 있어서 수송선과 전투선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전투선에서 무장을 해제하고 수송장비를 탑재하면 수송선이 되고, 같은 배에 전투 장비와 전투병을 탑승시키면 전투선이 되는 것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일본 수군 전투선인 아다케부네, 세키부네, 코바야부네 모두 일본 국내에서 평상시에는 수송용 선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왜군의 선박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왜의 전투 함대

가장 큰 선박은 “아다케부네”(安宅船)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보통 대장선이라 불렀다. 노꾼과 전투병을 합해 대략 120명 정도 탑승하였는데, 큰 배의 경우 200명 가까이 탑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길이 30미터, 폭 10미터 정도의 규모이다. 임진왜란 중에는 중무장을 했으나, 기동력이 떨어져 전투에 직접 참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대개 지휘관이 승선하여 후방에서 지휘를 한다. 조선의 기록과 일본의 기록 모두 아다케부네가 조선의 판옥선보다 크기가 작다고 나온다. 그런데 판옥선도 길이가 30미터 정도라고 하는데, 아마 판옥선이 2층으로 되어 있어 높이가 더 높아 그런 평가가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중간 규모의 전투선은 세키부네(関船)로서 대개 길이가 20미터 내외였다고 한다. 탑승 인원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노를 대개 40-50개 정도 갖추고 있었다고 하니, 총 탑승인원은 60-80여 명 정도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이후 조선수군과 벌어지는 해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세키부네가 주력 전투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장 작은 배가 코바야(小早)또는 코바야부네(小早船)라 하는데, 길이 6-8미터 정도에 15-20명 정도가 탑승하였다고 한다. 특히 코바야는 속도가 빠르고, 진로 변경이 용이하여 매우 민첩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승선 인원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르다. 10여 년 전 일본의 어느 역사 전문 출판사에서 발간한 일본의 해적, 즉 해상세력에 대한 특집판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는 아다케부네는 120명, 세키부네는 60-70명, 코바야부네는 16명이 탑승하며, 노병과 전투병의 비율은 대략 1:1 정도라고 나와있었다. 


그럼 왜 수군의 함선은 아다케부네, 세키부네, 코바야부네가 어느 정도 비율로 구성되어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기록을 찾아보아도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한번 추산을 해보기로 하였다. 

일본의 전투함: 아다케부네, 세키부네, 코바야부네

한산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와키자카의 경우 1,5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일본 수군의 선박이 몇 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본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다. 다만 “여러 장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와키자카가 공을 세울 욕심으로 혼자서 치고 나갔다.”라고 되어 있다. 이순신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으로 모두 73척이라 하고 있다. 


여기서 1척의 아다케부네에 120명이 승선하였다 치면 나머지 72척에 1,380명이 승선한 것으로 된다. 그러면 한 척에 20명이 승선한 꼴이다. 그렇다면 일본 수군 선박의 대부분이 꼬바야부네란 말이 된다. 그런데 이순신의 이 기록은 와카자키의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영주의 선박과 이후의 작은 싸움에서 만난 선박까지를 합한 것인지 혹은 숫자가 과장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른 예로 명량해전을 살펴보자. 명량해전에 있어서 왜 수군 병력 규모는 일본 측 자료에 “본대 133척, 후방 200척 이상, 병력 7,200명”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럼 한 척당 평균 탑승인원은 약 31명이 된다. 코부네 16명, 세키부네 50명, 아다케부네 100명씩 탑승하며, 아다케부네는 3척이라 가정하고 함선의 구성을 파악하기 위해 간단한 연립방정식으로 계산을 해보자. 그러면 코부네 280척, 세키부네 50척이 된다. 이걸 보더라도 일본 수군의 함선 구성상 소형 선박인 코바야부네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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