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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Aug 19. 2022

임진왜란(6): 왜 수군의 무기

왜 수군의 전투 방식과 조총(鳥銃)

지난번까지 임진왜란 시 조선과 왜의 수군 전력을 비교해 보았으니, 이번에는 무기와 전투 장비, 그리고 전투 방식에 대해 알아보자.


일본에서는 무사시대가 시작된 겐뻬이 전쟁(源平合戦, 1180-85)부터 이미 해전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겐뻬이 전쟁에서 미나모토 가문(源氏)이 타이라 가문(平家) 군을 마지막으로 격파하여 멸망시킨 전투는 혼슈와 규슈 사이에 있는 바다 칸몬 해협(関門海峡)에서 벌어진 탄노우라(壇ノ浦)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타이라 가문은 전멸하고 타이라 가문의 가장 어른인 도키코(時子,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처)는 외손자인 어린 안도쿠 텐노(安德天皇)를 안고 바다에 뛰어들면서 타이라 가문의 시대는 끝나버렸다.

탄노우라 전투

이후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도 대영주들 간의 전투에서 많은 해전이 이루어졌다. 가장 유명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모리(毛利) 가문 사이에 벌어진 해전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모리 가의 무라카미 수군(村上水軍)에게 크게 패했다. 이에 앞서 설명한 바 있듯이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쿠키 요시다카(九鬼嘉隆)에게 철갑선을 건조하도록 하였고, 쿠키 요시다카와 역시 임진왜란에 참전한 토도 다카도라(藤堂高虎) 등의 활약으로 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리고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해상세력의 무장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일본은 전통적인 해전 방식은 “사람을 제압하는 방식”이었다. 즉 적군의 배에 뛰어들어 육박전을 벌여 적병을 처단하고 배를 탈취하거나 불태우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일본만의 해전 방식이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에서 내려오는 가장 고전적인 전투 방식이었다. 생각해 보시라. 원거리 무기로는 활과 창밖에 없던 시대에, 이들 무기로 적의 선박에 얼마나 타격을 줄 수 있겠는가를. 사람의 힘만으로 던지는 투창은 거의 효과가 없었을 것이며, 화살도 거의 효과를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다 위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활을 쏘아보았자 그게 상대방에게 얼마나 타격을 줄 수 있었을까?

일본의 해전과공격 수단

이에 비해 적군의 배에 뛰어올라 백병전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은 큰 효과가 있다. 도망갈 곳도 없는 좁은 배에서 백병전으로 적에게 이긴다면 적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적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병사들이 웬만큼 숙달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도망갈 곳도 없는 배에서 칼과 창과 같은 무기를 들고 적과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나 같아도 아마 그냥 겁에 질려 떨었을 것 같다.


옛 전투에서 원거리 무기로 가장 많이 활용된 것이 활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에게 있어서는 활보다 더 중요한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조총(鳥銃)이다. 조총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조총은 서양에서 개발된 머스켓 총을 의미한다. 1543년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2자루의 머스킷 총을 구입하였다. 이때 그 대가로 4,000량을 지급하였다고 하는데, 현대 가치로 환산하면 2천만 엔-5천만 엔(2억 원-5억 원) 정도의 금액이었다고 한다. 이 총을 역 디자인하여 일본에서 총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이 총의 용도가 활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그다지 인기가 없었는데, 여러 번의 전투에서 그 위력이 입증되자 수요가 급격히 늘어,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 전국에서 약 50만 정의 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총이 대량 보급되자 가격도 떨어져 이 시기에는 조총 1 정의 가격이 쌀 9석으로서 현재 가치로는 백만 엔(천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조총은 중국에서 만든 말로서, 일본에서는 이를 “뎁뽀”(鐵砲)라고 불렀다. 뎁뽀는 총기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이지만, 이 시기에 총기라면 모두 조총이었기 때문에, 뎁뽀라면 곧 조총을 의미하였다. 우리는 무모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일컬어 “무뎁뽀”(無鐵砲)라 한다. 바로 총도 가지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넘을 일컫는 말이다. 뎁뽀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다니 얼마나 무뎁뽀한 넘인가?


머스킷 총의 “머스킷”은 프랑스어로 수리과의 새인 “새매”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머스킷 총을 “조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말도 있고, 또 머스킷 총의 전체 모습이 새의 부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조총”이라 이름 붙였다는 말도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설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일본에서 이 총을 복제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겼었던 것이 “나사”였다고 한다. 나사는 조총의 주요 부품이었는데, 이 시기 일본에서는 나사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나사를 만드는데 아주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덕택에 나사의 가치를 알게 되어, 이후 일본에서는 나사가 여러 곳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고 한다.   

조총의 위력이 입증된 나가시노 전투

그런데 조총의 위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여러 국내외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신뢰가 가는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최대 사거리가 700미터라는 말도 있고, 또 어떤 자료에서는 1킬로라 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머스킷 총을 복제하여 시험한 결과 총알이 400미터 정도 날아갔다고 하기도 한다. 또 총을 고정시켜 놓은 채 발사를 하였더니, 100미터 거리에서 90% 정도의 총알이 지름 1미터 이내의 표적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자료에서 100미터 정도 거리라면 사람 상체를 맞출 수 있는 확률이 50% 정도라 한다. 이것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미국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양군이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횡대로 밀집대형을 갖춘 채 사격을 하지만 총에 맞는 사람보다 맞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남북전쟁이라면 임진왜란으로부터 거의 300년이 지난 시기로서 그 사이에 총기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 위력이다.

머스켓 총이 주력무기로 등장한 근대 전투

임진왜란보다 30년 정도 뒤인 16세기 초중반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난 30년 전쟁 당시, 머스킷 총이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명중률을 갖는 거리는 30미터 정도였다고 나와 있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조총이 어느 정도 명충률을 발휘하는 거리는 기껏해야 50미터 이내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명중률이 낮기 때문에 왜군들은 특정 목표를 조준하여 발사하는 저격 사격보다는 일제사격으로 탄막을 형성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조총의 명중률과 관련하여 재미난 기록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후 20년이 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 벌어진 “오사카 여름 전투”(大阪夏の陣)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도쿠가와 측의 토도 다카도라(藤堂高虎)와 도요토미 측의 쵸소카베 모리치가(長宗我部盛親) 군대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토도 다카도라는 임진왜란 시 수군 대장 가운데 한 사람이다. 두 부대 사이에 몇 시간에 걸쳐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총에 맞은 병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총을 쏘는 병사들이 적의 총에 맞을까 두려워 대부분 제대로 겨냥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쏘거나, 총을 빨리 대충 쏘아버리고 얼른 고개를 숙이려 했기 때문이라 한다.  


머스킷 총은 16세기 초반에 발명되어 19세기 후반에까지 사용되었다. 즉 총이 개발되어 사라지기 전까지 350년이란 세월이 지났던 것이다. 따라서 같은 머스킷 총이라 하더라도 어느 시대의 총이냐에 따라 그 성능은 크게 다를 것이다. 왜군의 조총은 머스킷 총의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 위력이라는 것이 특히 해전에서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산도대첩이나 명량해전에서 우리 수군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라 할 것이다.  


그럼 왜군은 총이라는 화약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대포는 없었을까? 일본에서도 이미 대포는 개발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부터 대포가 가끔 전투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포의 사용은 극히 제한적이어서 공성전에서나 가끔 사용되었는데, 그것도 대규모 전투에서 1, 2대 정도 사용되는 정도였다고 한다. 대포는 화약을 대량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어, 대포보다는 조총이 오히려 효율적이라 하여 대포가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왜가 대포는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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