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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Sep 12. 2022

임진왜란(12): 해전의 지휘관들

일본 수군의 주요 지휘관

앞서 소개한 바 있듯이 일본의 수군은 군소 영주들의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의 주요 지휘관인 이순신과 이억기가 수군 경력이 일천한 장수였던데 비하여 일본의 영주들은 집안 대대로 수대에 걸쳐 해상세력으로서 이름을 떨친 자들도 있는가 하면, 지상전에서 용맹을 떨친 자들도 있다. 


앞에서 이야기하였지만, 일본의 해상세력을 해적(海賊)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이 노략질을 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대의’가 아니라 개인과 가문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다른 영주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대의를 지향하였는지는 의심스럽지만. 해적은 내륙 지방의 “악당”(惡黨)과 비교되는 개념이다. 악당 역시 범죄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좇는 군소 영주 혹은 무사를 일컫는 말이다. 


● 쿠키 요시다카(九鬼嘉隆): 왜군 수군 대장, 50세 


쿠키 요시타카는 일본 수군의 대장으로서,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일본의 오사카 시와 나고야 시 사이에 위치한 태평양 연안지역인 시마(志摩) 지방에 근거를 둔 군소 영주로서 곡식 산출량(石高, 고쿠다카)은 3.5만 석이다. 그는 비록 군소 영주에 불과하지만 그의 수군 경력은 눈부시다. 이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휘하에서 수군으로서 큰 전공을 세웠으며,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도 큰 활약을 보였다. 


그의 가장 큰 전공은 뭐니 뭐니 해도 일본의 전설의 해적이라 평가받은 무라카미 수군(村上水軍, 혹은 무라카미 해적이라고도 한다)을 궤멸시킨 일이다. 1576년 오다 노부나가와 모리 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모리 수군 600척에 대해 오다 군은 300척의 수군으로 맞섰으나 대패하였다. 이때 모리 수군의 주력군이 바로 무라카미 수군으로서, 무라카미 수군은 대대로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대를 이어온 가문이었다. 


일본에서 해상세력 하면 으레 무라카미 수군을 떠올릴 정도로 전설적인 해적이었다. 패전에 크게 노한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쿠키 요시타카가 중심이 된 오다 군의 수군은 철갑선과 대철포(大鐵砲)라는 신무기로 무장하여 복수전에 나서 1578년 무라카미 수군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모리 수군을 대파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에서도 해상작전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쿠키 요시타카는 해전에 있어서는 수많은 해전을 거친 역전의 용장으로서, 일본 수군에 있어서 그의 존재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토도 다카도라(藤堂高虎): 36세


토도 다카도라는 수군 대장인 쿠키 요시타카의 영지 시마 지방과 가까운 기이(紀伊) 지역의 영주로서, 수군 가운데는 가장 많은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는 참전 당시 2만 석의 영지를 보유하였는데, 전쟁 중에 7만 석으로 늘어났다. 


수군 대장인 쿠키 요시타카가 해상 세력으로 전통 있는 가문의 수장이었던데 비해 토도 다카도라는 토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영으로 들어가 큰 공을 세움으로써 당대에 일약 영주로 출세한 인물이다. 그는 특히 축성술에 뛰어난 실력을 보이고 있다. 그는 해상세력은 아니다. 수군으로서는 임진왜란이 그의 첫 전쟁이다. 임진왜란 시 그의 군대는 해전에 참전하였지만, 육전에도 여러 차례 참전하였다. 그의 군대는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머린(marine)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유재란 쿠키 요시타카가 참전하지 않아 토도 다카도라가 수군 대장을 맡았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전멸시켰으며, 조선 선비인 강항을 일본으로 끌고 간 자이기도 하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38세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한 일본 수군 대장이다. 그는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와키자카는 10대 때부터 뛰어난 무용을 보여 여러 차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당대에 자신의 힘으로 영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아자이 나가마사, 오다 노부나가 등의 군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단바의 붉은 귀신”(丹波の赤鬼)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도 많은 공을 세워 이와지(淡路) 섬 지역에 3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그 후계자의 자리를 두고 벌어진 시즈가다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7인의 창병(七本槍)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 7인의 창병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장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시 왜군 제 2부대 대장인 가토 키요마사(加藤清正), 그리고 함께 수군으로 참전한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 등이 포함되어 있다.


●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 29세


가토 요시아키라는 아와지 섬의 와키자카와 인접한 곳에 1.5만 석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데,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가토 요시아키라도 와키자카처럼 하급 무사에서 출세하여 당대에 영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크게 용맹을 보여 승승장구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패권을 잡는 여러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여 그 공으로 일약 영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함께 시즈가다케 전투 7인의 창병의 한 사람이다. 


이상에서 일본 수군의 주요 장수들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대부분 군소 영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된다. 일본의 전국시대가 아무리 혼란한 세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일개 하급 무사가 영주, 즉 다이묘(大名)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영주들은 가문 대대로 영지를 이어왔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안의 배경 없이 실력으로 영주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이다. 비록 영지가 작다고는 하지만 당대에 영주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 즉 무공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위에서 소개한 4명의 일본 수군 장수 중 대장인 쿠키 요시다카만 세습 영주이다. 그렇지만 그도 “전설의 해적”이라는 막강 무라카미 수군을 격파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나머지 장수들은 당대에 하급무사에서 영주로 출세할 만큼 눈부신 전공을 세운 자들이다. 즉 전쟁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전쟁 속에서 살아온 자들이다. 토도 다카도라나 와카자키 야스히로, 가토 요시아키라 등은 해전 경험이 없는 장수라지만, 이들이 다스리는 영지는 바다를 끼고 있어 그들의 부하들은 해전에 적지 않게 단련된 자들이다. 


수군 경력과 실전 경력으로 따지자면 왜장 하나하나가 우리 조선 수군의 장수들을 압도한다. 조선 수군과 맞선 것은 이러한 강력한 적이다. 수군 경력도 일천한 데다 해상 전투 경험도 거의 없는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조선 장수들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이렇게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적들과 대결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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