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의 주요 지휘관들
본격적으로 임진왜란의 해전을 살펴보기 이전에 조선과 일본 양군의 수군 지휘관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조선 수군의 주요 지휘관부터 알아보자.
● 이순신(전라좌수사, 삼도수군통제사, 46세)
민족의 영웅으로 숭앙받고 있는 분이므로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다만 무장으로서의 경력에 대해 잠깐 알아보도록 한다.
이순신은 1576년 무과에 급제한 후 부친의 3년상 기간을 제외한다면 임진왜란 당시까지 16년간 군에 복무하였다. 대부분의 기간을 함경도 지역에서 육군으로 근무하였으며, 수군 경력은 임진왜란 발발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2년 정도이다. 수군의 중간 지휘자인 수군만호 경력 1년, 그리고 전라 좌수영 사령관인 전라좌수사 경력 1년이다. 임진왜란 당시 나이는 46세로서, 조선 수군의 주요 장수 가운데서는 가장 나이가 많다.
● 이억기(전라우수사, 33세)
이순신이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대기만성형인데 비해 이억기는 10대에 이미 무과에 급제하였다. 21세에 종 3품인 경흥도호부사 자리에 올랐으니 당시의 이순신과 비교할 때 벼슬이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 이순신과는 함경도에서 육군으로 근무할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함경도에서 근무할 때 이순신이 조정으로부터 문책을 당하자 이억기가 나서서 그를 적극 변호하였다 한다.
이순신과 같은 해인 1591년 전라우수사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수군의 지휘를 맡게 된다. 약 13년의 군 경력 중 수군 경력은 1년인 셈이다. 임진왜란 당시 33세로 이순신과는 13살의 차이가 난다. 이순신이 실각을 하였을 때 이번에도 이순신을 적극 변호하고 나섰다 한다. 이억기는 비록 관직에서는 이순신보다 조금 앞섰지만, 아마 이순신을 큰 형님처럼 생각하고 따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이억기의 전공이 원균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실각하자 이억기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는데, 아마 이억기의 젊은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 원균(경상우수사, 삼도수군통제사, 42세)
이순신과 대비되어 무능한 데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장수로 알려져 있다.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니, 이순신보다 9년이 빠르다. 그는 이미 고위직에 있던 아버지 덕택에 부정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원균도 처음에는 주로 육군에 근무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인 1591년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으나 곧 탄핵을 받아 물러나고 이듬해인 1592년에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아마 원균이 이순신의 전임 전라좌수사였던 듯하다.
그런데 전라좌수사로 탄핵을 받았던 인물이 1년 만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었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 인사라 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42세로 이순신보다는 4살 아래였으나 이억기보다는 9살 위였다. 이순신 실각 후 이억기를 제치고 삼군수군통제사가 된 것은 그의 나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순신 장군은 그를 마치 벌레 보듯 싫어했으며, 거의 혐오하는 수준이었던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 기지 가운데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경상우수사로서 적과 싸워보지도 않은 채 스스로 모든 군선과 식량을 불태워버렸다. 그가 불태운 판옥선의 수는 54척으로 이순신이 보유한 판옥선 24척의 2배가 넘는 숫자이다. 그리고 칠천량 해전에서는 100척이 넘는 판옥선을 잃었으니 임진왜란 한일 양국 장군을 통해 가장 많은 함선을 파괴한 장수라 할 것이다.
임진왜란 중 거듭된 실책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뒷배가 든든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선택 대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인사인지 이유를 알 수 없다.
● 정운(전라좌수영 만호, 39세)
임진왜란 당시 39세 나이로 전라좌수영 만호의 직을 수행하였다. 이순신을 가장 잘 이해하였으며, 이순신이 가장 신임했던 참모였다. 일찍부터 왜구를 퇴치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수군 경력이 풍부한 그를 이순신이 많이 의지하였다고 한다. 수군 경력으로만 보면 그는 이순신에 비해 직급은 낮지만 대선배가 되며, 이순신은 그의 빈틈없는 일 처리를 보면서 인간적인 신뢰를 가졌다고 한다. 그와 자주 술자리를 갖는 등 개인적인 관계도 아주 돈독하였다고 한다. 옥포 해전에서는 출전을 망설이는 이순신에게 즉시 출전할 것을 진언하여 승전을 이끌어 내었다 한다.
정운은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이순신 장군으로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참모였으나, 부산포 전투에서 적의 유탄을 맞아 사망하였다고 한다.
● 이순신(방답진 수군첨 절제사, 경상우수사, 38세)
이순신 장군과 한글 이름은 같으나 한자로는 ‘李純信’으로 다르다. 임진왜란 당시 38세의 나이로 방답진(여수 돌산도에 있던 수군 방어기지) 수군첨절제사를 지냈다. 전쟁 기간 동안 이순신 휘하에서 중간 지휘관으로서 큰 활약을 하였다. 무술이 아주 뛰어나 이순신 장군이 그를 크게 신임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선봉장으로서 큰 활약을 하였다. 무과 급제 후 잠시 다른 관직을 거친 후 혜산진첨절제사가 된 후 계속 수군에서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노량해전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자 그가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사적으로도 이순신 장군이 그를 아주 허물없이 대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전투가 없는 날은 함께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수군 경력은 2년이 채 되지 않아 그야말로 일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약점을 정운과 이순신이라는 훌륭한 두 참모가 보완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