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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Sep 25. 2022

임진왜란(16): 옥포해전③

옥포해전 승전의 성과와 평가

전 회에서 옥포 해전은 전쟁 개시 이후 조선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는 점을 말한 바 있다. 이번에는 기록에 의존하지 말고 상식과 이성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이 전투가 갖는 의의와 또 여러 의문점을 검토해보자. 


1. 전투의 소득


이 전투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이순신이 일본 수군과의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라 생각된다. 지난번에도 언급하였지만 아마 이 전투에 임하기 전까지 이순신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불안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모든 불안을 이번의 일방적인 승리를 통해 모두 불식할 수 있었고, 이후의 전투에 자신감을 갖고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나아가서는 연전연패의 상태에 빠져있던 육상 전투에서도 조선군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도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조선 수군의 강점과 약점의 노정


이 전투에서는 완벽한 승리로서 조선 수군의 강점을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조선 수군이 가진 한계점도 명확히 노출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수군의 전투 방식은 고대로부터 답습되어온 적선의 배에 뛰어들어 벌이는 백병전 방식이었다. 이러한 전투 방식에 대해서는 일본의 많은 평가자들도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전투 방식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 전투 방식은 적군의 배에 올라타야만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옥포 해전에서 초반에 응전에 나선 일본 함선들은 조선 수군의 배에 올라타려고 했지만, 아웃복싱을 하면서 화포와 불화살로 공격하는 조선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였다. 전선의 대부분의 불타면서도 조선 수군에게는 부상자 1명이라는 타격밖에 입히지 못하였다. 


조선 수군은 이러한 일본 수군을 상대로 적을 마음껏 요리할 수 있었다. 직접적인 백병전보다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의 배를 파괴하는 전술은 일본 수군의 전투 방식에 비해 월등히 우수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 결과로 적선들을 대부분 격파하면서도 아군 쪽 피해는 거의 없었다는 대승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전투는 조선 수군의 취약점도 동시에 드러내었다. 현대전에서는 무기가 아주 중요하다. 전투 무기를 상실한 적병은 더 이상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다. 함선이나 전차, 항공기와 같은 전투 무기는 빠른 시간 내에 대체 투입이 불가능하며, 이러한 장비를 잃은 군대는 그 전투력을 회복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전 전쟁은 다르다. 사람, 즉 병사만 살아있다면 무기는 금방 조달이 가능하다. 즉 칼이나 창, 조총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무기는 금방 다시 갖추어지며, 병사는 다시 전투 능력을 회복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므로 해전에서도 적선을 파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병을 사살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조선 수군은 원거리 전을 했으므로 적병을 처단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옥포해전에서 공격을 나왔다가 파괴된 적선과 정박 중에 파괴된 적선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지고 있지 않다. 정박 중에 파괴된 적선에서는 아마 인명 피해가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 중에 파괴된 함선의 경우도 대부분의 적병들은 바다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옥포만의 경우 해안까지의 거리는 아무리 멀더라도 1킬로미터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 살아서 해안으로 헤엄쳐 갔을 것이다. 일본 수군의 코바야부네와 같은 작은 전투함이 있었더라면 바다에 떨어진 적군들을 쉽게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판옥선은 크고 높다. 바다에 빠진 적의 패잔병을 처리하는 데에는 도리어 약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수군의 전투 방식은 낡은 방식이라고는 하지만, 성공할 경우는 적을 섬멸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수군의 아웃복싱식의 전투 방식은 이것이 어렵다. 즉 결정적인 한 방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큰 취약점이라 할 것이다. 


3. 일본 수군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옥포해전에서 조선 수군과 싸운 왜군은 토도 다카도라(藤堂高虎)와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氏善)의 군대였다. 일본 수군 8,750명 가운데 토도 군이 2,000명으로 가장 많고, 호리우치 군은 850명으로서, 이들 두 군대를 합하면 2,850명이 된다. 그런데 옥포 해전 이후 이순신에게 당한 합포와 적진포의 왜선은 누구의 군대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측에서도 기록이 없다. 그렇지만 그 두 곳이 옥포에서 불과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토도나 호리우치 소속 수군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면 합포와 적진포에 있던 왜선은 옥포에서 탈출한 배였을까, 아니면 본대와 떨어져서 별도로 활동하던 배였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패전한 적은 자신들의 우군이 있는 쪽으로 도주하여야 한다. 그런데 합포와 적진포는 그 반대쪽이다. 그리고 이들 두 곳에 있던 왜선들은 전혀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런 점들을 생각한다면 옥포에서 탈출한 배가 아니라 별도로 활동하던 배일 가능성이 많다. 

이제 계산을 해보자. 적선은 옥포에 50척, 합포에 5척, 적진포에 13척이므로 모두 68척이다. 일본 측 자료에는 옥포에 있던 왜선이 30척 혹은 50척이라 했으므로, 만약 옥포 왜선을 30척이라 한다면 48척이라 할 것이다. 그럼 2,850명의 병력이 68척에 승선하였다면 1척 당 42명, 48척이라 한다면 60명이 승선한 꼴이 된다. 앞에서 여러 번 일본 전투함의 승선 능력을 설명한 바 있는데, 척당 60명이라면 거의 세키부네 정도의 탑승 인원이다. 그런데 왜선의 구성은 세키부네에 비해 작은 전투함인 코하야부네의 비율이 더 높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마 왜선의 총수는 68척이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왜선은 옥포에서 25척, 합포에서 5척, 적진포에서 13척 해서 모두 43척이 소실되었다. 그럼 나머지 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의 전투함들은 조선의 판옥선에 비해 빠르므로 아마 탈출에 성공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빠져나온 배들도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래서 남은 배들도 전투능력은 상당히 타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이 전투에서 패한 도도 다카도라와 호리우치 우지요시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냥 상상을 하는 것보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면 선택지는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이번 전투에서 반 이상의 함선을 잃고 남은 배들도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다. 칼이나 활, 창, 조총과 같은 개인 무기라면 금방 보급을 받으면 되겠지만 전투함은 빠른 시일 내에 회복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남은 배로 해전을 계속할 것인가? 전체 함선의 절반 이상을 잃은 상태에서 남은 배로 해전을 계속한다면 전투에 참가하는 병력은 반도 안 된다. 그러면 나머지 병력은 놀고 있어야 하나? 부대를 나누어 한쪽은 수군의 기능을 계속하고, 나머지 한쪽은 육상전에 투입한다? 이건 일본군의 군대 편제를 감안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결론은 바로 나온다. 토도 군과 호리우치 군의 남은 병력은 바다에서 모두 철수하며, 육군으로 전환한다. 즉, 토도 군과 호리우치 군은 유일한 선택지는 바다를 떠나는 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옥포해전의 전과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을 침공한 왜 수군 8,750명 병력 가운데 2,850명이라는 1/3에 가까운 전력이 바다로부터 이탈된 것이다. 물론 이들이 육상 전투에 투입되어 일본군 전체 병력으로는 큰 변동이 없겠지만, 바다에 한정해서 본다면 1/3이라는 전력 손실이 발생한 것이다. 단일 전투의 효과라는 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옥포해전이 한산대첩이나 명량해전을 능가하는 최고의 승리일지도 모른다.  


4. 일본군 함대는 수송선단이었나?


일본 자료를 보면 한결같이 옥포 해전에서 패한 일본 수군은 전투 능력을 그다지 보유하지 않은 수송선단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자료 쪽에서는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보기 어려우며, 어떤 곳에서는 해안마을에 노략질을 위해 옥포에 정박해있었다고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일본 측 자료와 마찬가지로 수송선단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곳에서는 수송선단인데 가는 길에 노략질을 하러 옥포에 들렀다고 하기도 한다. 


한결같이 이런 설명을 하고 있길래 나도 그런가 생각하였지만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수송선단이라는 점부터 검토해보자. 만약 이들이 수송선단이라면 과연 그 물품을 누구에게 수송하려고 했을까? 만약 다른 육상부대에 보급품을 수송하려 했다면 옥포보다 더 서쪽에 있는 남해안에 일본군 부대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통영보다 서쪽에 있는 일본군 부대는 없었다. 모두 한성 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영 서쪽 남해안에는 일본군이 전혀 진격해있지 않았다. 즉, 수송선단이 보급품을 전달해 줄 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 조선을 침략해온 일본군은 각 부대별로 자신의 보급품 운송은 스스로 책임지고 있는 편제였다. 그랬기 때문에 전체 병력의 40% 정도가 보급을 담당하는 병사였다. 


그럼 이 수군 부대는 다른 부대를 위한 수송선단이 아니라 자신의 부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싣고 가는 수송선단이 아니었을까?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옥포해전에서의 토도 군이나 호리우치 군은 자신의 부대의 전 병력이었다. 자신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부대가 필요로 하는 보급품을 운송하게 한다? 이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우리 자료에 나타나듯이 노략질을 위한 부대였다? 이것도 믿을 수 없다. 우선 옥포라는 조그만 섬마을에 3천 명에 가까운 노략질할 만한 물건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때는 일본군의 군량 사정도 아주 좋았다. 군량을 현지 조달할 필요는 전혀 없었고, 가난한 섬마을을 털어봤자 비용 대비 수익은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때만 하더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민간인 약탈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전쟁 초기 바쁜 상황에서 전 병력을 동원하여 노략질을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 왜군들은 대체 무엇을 하러 수군 대부대를 거느리고 옥포까지 왔을까? 아마 경상도 방면에서 후퇴하여 은신한 조선의 전투함을 수색하거나 조선의 수군 기지를 조사, 공격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자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서라도 왜군 함선의 전투능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피하다. 본격적인 해전에 대비하여 중무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정도의 전투 능력을 갖춘 함대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옥포해전에서의 일본군 패전이 전투기능이 취약한 수송선단이었기 때문이라는 일본 자료는 믿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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