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의 전개와 왜 선단 섬멸
옥포는 거제도 동쪽에 있는 포구로서, 현재 대우조선 옥포조선소가 위치해 있다. 옥포는 ‘ㄷ’ 자처럼 생긴 만 안쪽에 위치해 있다. 옥포만은 폭이 2킬로미터 남짓한 좁은 곳이다.
5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해있는 왜선 50여 척을 발견하고 공격을 개시한다. 먼저 6척의 판옥선이 선봉으로 나아가면서 적선을 향해 달려가면서 포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조금 의심이 간다. 왜냐하면 판옥선은 배의 양쪽에 화포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달려가면서 화포를 쏠 수는 없고, 화포를 쏘려면 배를 옆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먼저 선봉이 앞으로 나아가 적선을 공격했다고 하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전투의 전개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자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옥포 포구에 정박해있는 적선 50여 척을 발견하여 재빨리 이를 동서로 포위한 후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들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다. 선봉에 선 6척의 판옥선에 이어 전 조선 수군이 정박 중인 일본군 함선과 일본군 진영에 포격을 가해 적선 26척을 격침시켰다. 함께 출전한 원균의 경상 우수군도 5척(26척에 포함)의 배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전투에서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몇 척에 불과하였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왜적은 육지로 달아났다."
이 해전에서 조선군의 피해는 부상자 1명에 불과하였다.
남은 적군이 도주하자 이순신은 회군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합포(현재의 마산) 앞바다에서 적선 5척, 그리고 다음날 적진포(통영시 아래쪽)에서 적선 11척을 불태웠다. 이리하여 첫 번째 출전에서 모두 42척의 적선을 파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해전에 대해 일본 측 기록을 살펴보자.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정박지로 생각되는 가덕도를 향하여 동진하던 중 도중에 거제도의 옥포에 일군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진로를 남으로 돌려 옥포에 접근하였다. 옥포에 정박 중인 일본군 함선은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와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氏善)를 대장으로 하는 수송 선단으로서, 그 수는 30 또는 50이라고도 하는데, 대소의 선박으로 구성되어 상당히 수적 열세였다. 적군은 이순신(전라 좌수사)을 비롯하여 어영담(광양 현감), 권준(순천 부사), 구사직(가리포 검사), 이억기(전라 우수사), 원균(경상우수사), 이운용(옥포 만호) 등이었다.
적선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일본 수군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배를 저어 반격에 나섰다. 그 기세에 눌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조선 수군의 선봉에서 6척이 도망쳤다. 그러나 이순신은 군을 고무시켜 다시 돌격을 개시하였다.[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状)].
조선 수군의 전술은 적선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활과 화포로 적병을 쓰러트리고, 불화살로 적선을 불태우는 것이 상투 수단이었다. 조선 수군은 왜구들과의 전투 경험이 많은데, 왜구들은 전통적으로 배를 갖다 붙여 아군의 배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하는 것을 주 무기로 한다는 점에서 접근전을 아주 싫어하였다. 이순신도 사격, 포격전으로 적을 압도하여, 접근을 시도하던 도도ㆍ호리우치의 병력은 차례차례 불탔다. 일본 수군 장수와 병졸들은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 바닷가로 도망쳐 산개하였다. 이 싸움에서 일본 수군의 피해는 인적 피해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주 경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함선 피해는 13척 소실 혹은 26척 소실 혹은 40척 소실 등 여러 설이 있다.
대승은 거둔 조선 수군은 밤이 되어 거제도에 있는 영등포에 닻을 내릴 예정이었지만 척후선이 북으로 향하는 5척의 일본선(소속 불명)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들을 추격하였다. 전력 열세였던 일본 수군은 합포로 도망쳐 들어가 병사들은 상륙하여 무사히 도망쳤으나, 해안에 남아있던 배는 조선군에 의해 모두 불타버렸다.
다음날 8일 척후선이 진해에 일본선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조선 수군은 새벽부터 수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적진포에 일본선 13척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배로 돌아가지 않고 육지에서 조총을 발사하였는데, 조선수군은 육전을 피해 방치된 배를 불태운 후 점시 교전한 후에 퇴각하였다.
합포에서는 5척, 적진포에서는 13척이 소실되었는데, 이 두 전투 모두 인적 피해는 아주 경미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침몰된 배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순신은 그대로 계속 포구마다 정찰을 계속하면서 9일 전라좌수영으로 귀환하였다.
이들 해전은 모두 다 대해전이었던 것은 아니며, 척후선을 앞세워 신중하게 행동한 이순신의 목적은 연전연패의 소식에 의기소침해있던 조선 수군 장졸의 사기앙양에 있다고 생각된다. 전과도 배를 불태우는 선에 머물렀으며, 집요한 추격은 없었다. 일본 수군이 반격을 하기 전에 숙련된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철수하였다.
옥포해전에 대한 한일 양국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선박 피해에 대해서는 양쪽의 숫자가 대략 비슷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전투에 관해 일본 측에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많은 부분 한국의 기록에 근거하여 이 전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명 피해에 있어서는 양쪽의 기록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본 측 기록에는 인명 피해가 경미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측 기록에는 개략적인 숫자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많은 수의 적군을 죽인 것으로 나오는 자료가 적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천명 이상의 적군을 죽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무엇에 근거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들 자료는 대개가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는 문건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 조선군이 올린 최초의 승리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임금인 선조는 몽진 중이라 이 소식을 바로 듣지는 못하고, 한참 지난 뒤 알았다고 한다. 이 전공으로 이순신은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가선대부는 종 2품에 해당하는 벼슬로서, 전라좌수사는 정 3품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벼슬이 한 단계 올라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