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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Oct 09. 2022

한국에 와서 고생하는 일본어들

고생하는 일본어, 재미있는 일본어

오늘은 한글날. 아마 언론에서는 연례행사처럼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며, 무분별한 외국어, 외래서 사용을 자제하자는 캠페인이 벌어질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또 이후에도 많은 문물이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래된지라 우리 생활 속에 사용하는 일본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뜻이 와전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엉뚱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아예 정착되어 우리말화 한 단어도 있는 것 같다.


생각나는 대로 재미나는 일본어 몇 가지를 알아보자.


● 와리깡(割勘), 깡(勘): 와리깡((割勘) 혹은 깡(勘)이란 말은 ‘할인’이라는 뜻으로 거의 우리말로 정착한 듯하다. 언론에서도 이 말은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사용된다. 어음할인은 어음 와리깡 혹은 어음깡,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는 방법으로 현금을 조달하는 것을 카드깡 등으로 사용한다. 그럼 와리깡이란 무슨 뜻일까?


깡(勘, 감)이란 숫자를 센다는 뜻, 그러니까 계산이라는 뜻이라. 요즘은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만 옛날에는 ‘술값’을 간죠(勘定)라 하기도 하기도 했다. “야, 간죠 얼마 나왔어?”하면 “술값 얼마야”란 뜻이다. 그래서 깡(勘)이라면 ‘계산’, ‘값’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와리깡(割勘)이란 “계산을 나눈다”, 즉 ‘더치 페이’를 뜻한다.


일본에서 ‘더치 페이’란 뜻을 가진 일본어가 한국에 와서 졸지에 ‘할인’이라는 뜻으로 바뀌어버렸다. 참고로 할인(割引)은 ‘와리비키’이다.


● 단도리(段取り): 우리나라에서는 ‘단도리’라면 ‘단속’ 정도로 사용되는 것 같다. 추운 날 밖에 나갈 때면 단도리 잘하고 나가란 말을 한다. 신문기자들도 빈틈없이 기사를 쓰는 것을 단도리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단도리는 한자로 ‘段取’라고 쓰는데,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단’을 취한다란 뜻인데,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단(段)이 무엇일까?


일본 전통 연극인 가부키(歌舞伎)에서는 한 막을 단(段)이라 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계획을 세우는 것을 ‘단도리’라고 한다. 또 돌계단을 만들 때 무작정 만들면 경사나 돌 받침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계단을 만들기 전에 미리 계획을 세우는 것을 단도리라고 한다. 어느 쪽이라도 모두 사전에 일의 준비를 잘하는 것, 즉 ‘계획’, ‘설계’ 등을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단속이라는 뜻으로 변해버렸다.


● 독고다이(特攻隊): 독고다이는 특공대, 즉 자살 공격대인 가미카제 특공대(神風 特攻隊)를 의미한다. 무협소설식 표현을 빌리자면 동귀어진(同歸於盡), 즉 “너 죽고 나 죽자”란 뜻이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독불장군’이라는 뜻으로 바뀌어버렸다.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독고다이란 말이 원래 뜻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물론 “독고산” 혹은 “독고사이”로 와전되기도 했다.


그런데 동귀어진이라는 뜻의 이 말이 어느 사이엔가 ‘독불장군’이라는 뜻으로 바뀌어버렸다. 사람들이 워낙 독불장군이라는 뜻으로 독고다이란 말을 사용하니까 이제는 우리말 사전에도 “독고다이: 독불장군”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와서 독고다이가 동귀어진이니 뭐니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 무뎁뽀(無鐵砲): 우리는 무모한 사람을 가리켜 ‘무대포’라고 한다. 무대포가 왜 무모한가? 뎁뽀(鐵砲)란 ‘총’을 말한다. 그러니까 무뎁포란 총도 없이 전쟁에 나서는 넘을 말한다. 2차 대전 때 소련군은 총이 부족하여 병사 5명 당 총 1자루를 지급했다고 한다. 앞에서 총을 들고 공격하던 병사가 쓰러지면, 다음 병사가 그 총을 들고 다시 공격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병사 5명 중 4명은 무뎁포였던 셈이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 ‘무대포’란 말로 정착한 것 같다. 무대포이면 ‘無大砲'일 텐데, 일본에서는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는 것을 당연시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쟁터에는 대포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스케일이 큰 것 같다.


● 다꾸앙(沢庵): 요즘에는 ‘단무지’란 우리말이 완전히 정착하였지만, 내가 어릴 때는 모두들 ‘다꽝’ 또는 ‘다꾸앙’이라 했다. 지금도 중국집 짜장면에는 아무래도 단무지 보다는 ‘다꾸앙’이 어울린다.  


다쿠앙(沢庵) 화상은 전국시대 말기에서 에도 시대에 걸쳐 살았던 일본의 고승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측근이기도 하였다. 도쿠가와 막부가 권력을 잡으면서 막부는 사찰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제를 실시하였다. 일본 불교에서 승려의 법의로는 보라색 옷이 고승을 상징하였다. 당시 대사찰이었던 대덕사(大德寺)의 주지였던 다쿠앙 화상은 막부의 허락 없이 보라색 법의를 입었다가 귀을 가게 되었다.


지에서 주민들이 주는 무를 절여 반찬으로 만들어 먹었는데 사람들은 이 음식을 다쿠앙 화상의 이름을 따 ‘다쿠앙 절임’, 간단히 ‘다쿠앙’이라 하였다. 또 다쿠앙 화상의 얼굴이 사각형이어서, 무절임이 다쿠앙 화상의 얼굴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다쿠앙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다꾸앙은 다꾸앙 화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 사루마다(猿股): 요즘은 ‘사루마다’란 말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모두 팬티를 사루마다라고 불렀다. 물론 여러모로 와전되어 ‘사루마다’뿐만 아니라 ‘살마다’, ‘사리마다’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사루마타(猿股)란 한자 뜻 그대로 “원숭이 가랑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아니 오히려 여자 팬티를 사루마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사루마타는 원래 일본에서 남자용 긴 팬티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용 팬티를 왜 하필 “원숭이 가랑이”라 했을까? 몇 가지 설은 있지만,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없다. 잘 아시다시피 옛날 일본 남자들 속옷은 팬티가 아니라 훈도시(褌), 즉 T백 팬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사루마타는 일본에서도 근대에 들어 생긴 말이다.


● 바카(馬鹿): ‘바보;라는 이 말이 요즘 우리에게 갑자기 친숙한 말이 되었다. 윤석열의 “이 새끼들”이 일본 신문에서 "바카야로 도모"(馬鹿野郎ども, 바보 새끼들)로 번역되었다. 바카는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옛날부터 익히 알고 있던 말이었지만, 대체로 '빠가‘라고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 '바카‘ 혹은 '바까‘라고 발음해야 한다. 짐작하시다시피 지록위마(指鹿爲馬)에서 유래된 말.


야로(野郞)는 우리의 ‘놈’, ‘새끼’, 정도에 해당하는 말인데, 이 말은 원래는 성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욕으로 바뀌었다. 내친김에 야로에 반대되는 말로 여랑(女郞, 죠로)이라는 말이 있는데, 옛날부터 ‘창녀’를 일컫는 말이다.  


일본어로 하마(河馬)는 ‘카바’이다. 그래서 하마가 물구나무를 서면 바보(바카)가 된다.


● 덴뿌라: 요즘은 ‘튀김’이라는 우리말로 완전히 정착되었지만, 이전에는 모두들 덴뿌라라고 했다. 일본에 가면 한자음을 빌려 ‘天ぷら’ 혹은  ‘天婦裸’로 표시하는 곳도 제법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의 생활용어가 그렇지만, 어원이라는 것이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덴뿌라는 전국시대 말기, 그러니까 16세기 후반 경 서양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음식이다. 포르투갈의 사원 요리의 하나로서, 사원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텐포라(temporas)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소수설이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지방에서 하급 사무라이가 영주의 첩과 정을 통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여자와 함께 동경(에도)으로 도망을 쳐왔다. 낭인이 된 사무라이는 천하에 쓸모없는 것, 결국 여자가 튀김 장사를 하여 입에 풀칠을 하고, 남자는 빈둥빈둥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를 본 사람들이 천하(天下, 텐카)의 사무라이가 빈둥빈둥(부라부라) 놀며 지내다니, 쯧쯧 하며 혀를 찼다고 한다. 거기서, 천하의 ‘텐카’와 빈둥빈둥의 ‘부라부라’를 합해서 ‘텐뿌라’라고 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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