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여자 검객과 천하에 멍청한 사무라이
홍콩영화 <외팔이> 시리즈처럼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무협 영화가 적지 않다. 온전한 몸으로도 헤쳐나가기 어려운 무(武)의 세계에서 핸디캡을 안고 싸워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감명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서도 장애인 주인공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자토이치(座頭市)로서 그는 눈이 먼 맹목(盲目)의 검사(劍士)이다. 이 외에 오른팔과 오른쪽 눈이 없는 단게 사젠(丹下左膳)도 그러한 인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토이치와 단게 사젠에 대해서는 다음의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
https://blog.naver.com/weekend_farmer/222439957421
https://blog.naver.com/weekend_farmer/222325098839
영화 <ICHI>(いち)는 자토이치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어 리메이크한 작품으로서, 2008년에 제작되었다. 눈이 먼 여성 가운데 예능을 하는 여자를 ‘고제’(瞽女)라고 한다.
이치(市)는 눈이 먼 여자 예인(藝人), 즉 고제(瞽女)로서 사람을 찾으러 홀로 여행을 하고 있다. 추운 날 잠잘 곳이 없던 이치는 근처의 창고에서 쉬려고 하고 있는데, 근처에 사는 남자가 그녀를 동정하여 음식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 남자는 실은 이치에게 손을 뻗치려 온 것이다. 이를 눈치챈 이치는 지팡이 속에 든 칼로 그 남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어느 날 이치아 함께 다니던 고제가 낭인에게 몸을 허락하고는 돈을 달라고 한다. 그러나 남자들은 여자가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녀에게 폭력을 가한다. 낭인들은 이치를 발견하고는 덮치려고 한다. 그곳에 우연히 나타난 토마(十馬)라는 이름의 사무라이가 이것을 막아준다. 그러나 토마란 사무라이는 칼을 뽑지 못하고 움츠려든다. 대신 가진 돈을 모두 낭인에게 주고는 눈감아 달라고 사정한다. 그렇지만 낭인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토마를 죽이려고 칼을 빼든다. 토마가 낭인들의 칼에 위기를 맞는 순간, 이치가 눈부신 칼 솜씨로 낭인들을 쫓아버린다.
낭인들에게 논을 모두 내주어 빈털터리가 된 토마는 이치와 함께 숙소로 간다. 그곳에는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치가 여기에 끼어들어 큰돈을 따 토마에게 준다. 이치에게 돈을 잃은 불량배들이 이치에게 공격해오나 이치는 간단하게 이들을 물리친다. 그것을 본 시라카와 조(白河組)의 젊은 두목은 토마가 불량배를 물리친 것으로 잘못 알고 토마를 경호원으로 고용한다. 이치가 쓰러트린 불량배들은 만귀당(万鬼党)이라 불리는 흉악한 패거리의 소속원들이었다.
경호원으로서 고용된 토마였지만, 그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다. 무가(武家)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에 검술 수련을 하면서 잘못하여 어머니의 눈을 멀게 하였다. 이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그는 막상 싸워야 할 때는 칼집에서 검을 뽑지 못하는 것이다. 그 후 만귀당이 시라카와 조에 공격을 해온다. 토마는 이들에 대항해 싸우려고 했으나, 칼집에서 칼을 뽑지 못하여 결국 경호원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나이 많은 시라카와 조의 우두머리는 살해되고 만다.
이치는 찾고 있던 사람이 만귀당의 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만귀당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만귀당의 두목 만귀로부터 찾고 있던 사람이 이미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만귀와의 싸움으로 엉망이 된 이치는 잡혀서 감옥에 갇힌다.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곳에 토마가 그녀를 구하러 찾아왔다. 그리고 이치는 숙소에서 잔일을 하는 코타로의 간병을 받는다.
드디어 토마는 만귀와의 싸움에 나선다. 그때까지는 검을 뽑을 수 없었던 토마였지만, 이번 싸움에서는 만귀와 대등하게 싸운다. 서로 필살의 일격을 가하려고 공격을 하는데, 만귀는 무사하였지만 토마는 쓰러지고 만다. 이치는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만귀에게 달려가 싸워서 그를 쓰러트린다. 이치는 마을을 뒤로하고는 토마의 어머니의 묘 앞에 칼을 바친다.
이 영화를 보면 이치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토마는 완전 바보나 다름없다. 그는 어머니를 다치게 한 트라우마 때문에 막상 중요한 때에는 칼을 뽑을 수 없다. 그래서 만귀당의 패거리들이 습격해와 시라카와 조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해치는 것을 보면서, 싸우려고 칼집에서 칼을 빼려 하지만 도저히 칼을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수많은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싸울 수가 없었다.
참 이런 멍청이 같은 작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토마는 만귀당 패거리들이 쳐들어 오는 것을 알고 동료들과 함께 대비하고 있다가 이들이 공격해오면 그때 칼을 뽑으려 한다. 그러나 칼은 뽑히지 않는다. 정상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적이 공격해오는 것을 알면 미리 칼을 뽑아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적이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때 가서 칼을 뽑으려 하니 그 낭패를 당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적이 쳐들어 오는 것을 몰라 미리 칼을 뽑아놓을 시간을 놓쳤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동료들에게 자신의 칼을 뽑아달라고 부탁을 하던지, 아니면 다른 동료들의 칼을 빌려 싸우면 될 것이다. 토마는 일당백의 검술 실력을 가졌다. 그런데도 자신의 칼을 뽑지 못해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다. 도대체 이런 멍청이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