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나의 이사 이야기 - 4 D - 220
‘응답하라 1988’에 푹 빠졌던 적이 있다. 그 드라마를 좋아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덕선이의 남편을 추리하며 한 배우를 응원했다. 피앙세 반지를 탁자에 두고 나오던 그 배우의 떨리는 손가락에 격하게 감정 이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진한 여운으로 남아있는 장면은 모두 이사한 뒤 남은 텅 빈 집안과 골목 구석구석의 모습이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서로의 집에 남은 것은 아련한 흔적과 추억뿐. 곧 허물어질 일을 기다리는 동네를 지켜보는 건 인생의 한 페이지가 완벽하게 넘어가는 쓸쓸한 일이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도 새로운 페이지를 받아들여야 했다.
쌍문동의 그들처럼 나도 인천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까지 이 곳을 벗어난 적 없이 다녔다. 어쩌다 보니 결혼도 인천사람과 하는 바람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향에 붙어 살아온 뼛속까지 토박이였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지도가 쫙 펼쳐지는 곳,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아도 최단거리와 최단시간의 동선이 그려지는 곳, 골목마다 숨어 있는 작은 가게의 흥망성쇠를 꿸 수 있는 곳에서 47년을 살았다. 그 시간의 공기와 온도는 내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있었다.
결혼 후에도 같은 아파트 안에서 2번 움직인 게 전부일 정도로 참 변화 없이 살아왔다. 그렇게 47년을 반경 1km도 안 되는 곳에서 옮겨가며 살던 내가 11km나 떨어진 먼 곳으로 이사 가야 했으니. 47년 만에 맞닥뜨린 ‘제대로 된 이사’가 낯설고 어색할 수밖에.
그래서일까? 누군가에겐 11km ‘밖에’ 안 되는 거리가 나에겐 11km ‘씩이나’ 되는 멀고도 아득한 거리로 느껴졌다. 나에게는 익숙했던 흙냄새와 이별하는 거리였고 삶의 뿌리가 뽑혀 새로운 땅으로 옮겨지는 두려움만큼의 거리였다.
2년 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엄마는 그리움보다 무서움에 시달렸다. 방 안에서 아빠가 불쑥 나올 것 같고 금방이라도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올 것만 같다고 했다. 보고 싶은 마음 안에 도사린 두려움과 이승과 저승 사이의 거리를 실감한 탓이겠지만 쉽사리 없어지지 않을 괴로움이었다. 밤이면 무서움증이 더 심해져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동안은 친정에 가서 엄마와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이면 우리 집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엄마는 환경을 바꿔보려고 이사도 알아봤지만 친정오빠와 내가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쉽게 움직이지 못한 채 상실의 시간을 고스란히 견뎌냈다. 이런 상황에 난데없이 딸이 이사를 가게 되었으니, 내색은 못해도 엄마의 서운함은 당연했다. ‘내가 이사 가고 나면 얼마나 허전하실까?’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엄마 생각만 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사를 앞두고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엄마만이 아니었다. 이 곳에서 이어온 많은 인연도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을 것 같은 위태로움이 나를 짓눌렀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주변머리도 없고 그럴만한 에너지도 애써 짜낼 자신이 없었다. 관계의 보호막 속에서 안정감을 누리다가 갑자기 밖으로 튕겨나간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원가족과의 거리, 나를 둘러싼 환경, 관계의 흔들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막막했다. 자주 우울했고 하는 것 없이 마음만 바빴다. 나로 살기 위해 꽉 붙잡아 두었던 것들을 놓아야 했고 그때마다 깊은 상실감에 휩싸였다. 공들여 쌓아 둔 타이틀을 벗은 자리엔 무력하고 연약한 ‘나’만 남았다. 학생이란 안전한 위치에서 벗어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그때의 막막함이 이 나이에 다시 찾아왔다. 청춘이 품고 있는 가능성, 희망, 적당한 무모함까지 오래전에 잃어버린 ‘나’는 분갈이를 앞둔 시든 화초가 된 것 같았다.
우선은 하던 일부터 마무리하기로 했다. 괜한 감상에 빠져 있을 틈도 없었지만 일을 붙잡을수록 ‘이사’ 자체에 대한 회의감만 커졌기 때문이다. 잡념이 들어올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빠르게 일을 정리해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설명하고 그간의 수업 진도와 아이들에 대한 피드백을 전달하느라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다. 아이들 성향에 맞는 새로운 선생님을 소개하고 수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때마다 고마운 인연을 놓아야 한다는 아쉬움에 허탈했다.
수업이 정리될 때마다 돌아가는 아이들의 뒤통수에 코끝이 찡해졌다. 매일 많은 이별을 숙제처럼 해내야 했던 그때, 아쉬움이란 감정 뒤에 숨은 두려움이 크게 다가왔다. 새로운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건 지금의 나에게 큰 용기를 요구했다. 꼬박꼬박 먹어온 나이가 무겁기만 했다. 너무 좋아했던 일이라 힘든 줄도 모르고 신나게 했던 일을, 13년 동안 온 열정을 쏟은 일을, 이렇게 놓아야 하는 건 아쉽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계속 올라오는 불편한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수업하는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지난 교재들을 보니 책 수업을 했던 순간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엄마, 딸, 며느리가 아닌 책 선생으로 살았던 시간이 고맙고 행복했다. 이제는 대학생이 된 제자들이 꼬맹이 시절 그려준 내 모습을 보니 아이들과 주고받은 사랑에 가슴이 벅찼다. 교사로 사는 동안 썼던 13권의 다이어리에는 깨알 같은 메모가 빼곡했다. 읽어야 할 책, 교사로서의 다짐, 시간표, 수업 계획안, 상담 일지까지 모든 기록이 생생했다.
‘나 참 열심히 살았구나.’
부지런히 달려온 내가 그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학부모들이 보내준 감사 편지와 동료 선생님들에게 받은 손편지까지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던 중 한 줄의 글 위에 시선이 멈췄다.
‘삶은... 보물찾기.’
언제 썼는지, 왜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 문장이 지금의 나에게 용기를 건네는듯했다. 그때도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앞에 둔 상황이었을까? 시도의 초조함과 시작의 긴장이 문장에서 묻어났다. 잔잔하게 고인 물속에 이사라는 돌멩이가 던져지자 잊었던 첫 마음이 떠올랐다. 13년간 차곡차곡 쌓아둔 기록은 다시 꾸려갈 일상에 대한 섣부른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몰아내 주었다. 그 담담한 위로가 오늘의 보물 찾기였을까? 익숙함을 뒤로하고 새로운 여정을 앞에 둔 그 시간, 공허한 마음과 희미한 설렘이 교차하며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