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나의 이사 이야기 - 10 D - 120
여러 권의 책을 통해 공사의 전체 과정을 훑고 나니 공사를 진행할 부분과 그대로 살릴 부분이 명확히 보여서 공사 범위를 좁히기 수월했다. 그간 모은 자료를 정리하면서 이른바 ‘북유럽 스타일’이라 불리는 건조한 듯 보이면서도 따듯함이 배어 나오는 분위기가 내 취향이라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됐다.
집 분위기에 맞는 메인 색상을 정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서브 컬러를 2-3가지 선정하라는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메인 컬러는 진작에 ‘흰색’으로 잡았다. 벽지와 바닥재를 모두 흰색으로 하고 거기에 포인트가 될 대리석 벽에 서브 컬러인 연회색을 넣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업체에서는 바닥까지 흰색이면 집이 붕 떠 보인다며 말렸다. 전문가의 노하우를 귀담아들으려 했지만 내 인생에 마지막 이사 일지 모르잖은가. 공사 후 실망하더라도 내가 끌리는 것으로 일단 저질러보고 싶었다. 내 예상대로 업체는 자기들의 의견만 고집하지 않았다. 대신 창백한 흰색보다는 회색 물감 한 두 방울 떨어뜨린 듯한 세련된 분위기의 아이보리색 바닥재를 찾아주었고 단번에 이거다 싶어서 바로 결정했다.
업체와 달랐던 몇 가지 의견 중에 좀처럼 좁히지 못한 건 싱크대 상판 자재였다. 사장님은 우리 집에서 포인트가 될 만한 것은 거실 벽과 싱크대 상판뿐이라며 천연 대리석을 추천했다. 나는 비용이 확 늘어날까 봐 내심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사장님도 지나치게 밋밋한 분위기를 걱정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내 의견의 대부분을 반영해주던 업체가 이렇게까지 물러서지 않는다면 나도 충분히 고민해야 했지만 결국 제한된 예산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보다 못한 사장님은 비용 추가 없이 천연대리석으로 교체해 준다는 무리수를 뒀다.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천연대리석을 써본 적도 없는 데다 주변에 천연대리석을 사용한 지인도 없는지라 비용을 떠나서도 선뜻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천연’이란 말이 주는 자연친화적(?)인 느낌과 사용해본 적 없는 소재에 대한 호기심, 무엇보다 사장님의 강력한 추천에 대한 믿음까지 작용해서 천연대리석 상판으로 떠밀리듯 정했다.
이제 남은 결정은 욕실. 조금 지친 탓이었는지 실장님이 미리 뽑아온 예상 조감도를 보자마자 내가 원했던 분위기와 꼭 맞아떨어져서 자세히 뜯어보지 않고 바로 오케이 해버렸다. 공사 후 제일 오랫동안 속 썩인 것이 욕실 공사였으니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상담 과정에서 제일 후회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사하고도 오랫동안 욕실을 사용하지 못한 사연이 있었으니 말이다.
자재 미팅과 실측이 끝나자 바로 공사가 시작됐다. 입주민 동의서 받는 일부터 업체가 모두 맡아주어서 내가 일부러 공사 현장에 가지 않아도 됐다. 이사할 곳이 멀어서 자주 가기 힘들었던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공사 현장의 진행 상황을 사진으로 전송받았고 사진 속 우리 집은 날이 갈수록 북유럽 어드메쯤에 있을 법한 공간으로 변신했다.
일주일쯤 공사가 진행됐을 때, 시공하시는 분들 간식과 음료를 챙겨서 이사할 집에 방문했다. 그날은 욕실 공사팀이 작업하고 있었다. 간식을 전해 드린 뒤 공사가 진행된 부분을 둘러보았다. 싱크대며 바닥이며 모두 뜯어낸 뒤라 집은 누더기 같았지만 전날 붙여놓은 거실 포인트 벽타일은 예상보다 근사했다.
주방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벽 속에 숨은 수납장도 깨끗한 문짝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비용을 줄이려고 뒤틀린 내부장은 그냥 쓰기로 했었는데 안을 살펴보니 내부까지 새 것으로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비용을 추가하기 어려운 줄 알면서도 자기 집처럼 세심하게 신경 써준 게 다시금 고마웠다. 업체 선정하느라 고민했던 2주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탁월했던 나의 선택에 흡족해하며 주방을 나서는데,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게 웬일인가.
주방 벽타일이 물결치고 있었다. 무슨 착시 현상인가 싶어서 멈춘 다음 자세히 들여다보니 삐뚤빼뚤, 울퉁불퉁 요철이 심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줄눈의 간격과 위치도 맞지 않았지만 매끄럽게 마감되지 않은 벽 위에 타일을 붙인 탓이 큰 것 같았다. 일단 사진부터 찍어서 실장님께 전송하고 피드백을 기다렸다.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싶어서 지인들에게도 사진을 보낸 뒤 의견을 물었다. 다들 ‘우리가 붙여도 이 정도는 붙이겠다’는 반응이었다.
곧 실장님에게 연락이 왔는데, 사진 상으로는 이상이 없어 보인다며 사람이 하는 일이라 완벽하게 매끄럽긴 어렵고 내가 고른 타일이 워낙 작아서 그렇게 보일 수 있다고 했다. 순식간에 너무 까다로운 사람으로 몰린 기분이 들었다. 실장님이 추천해서 결정한 타일인데 내 책임을 묻는 듯한 대답이 돌아오자 납득하기 더 어려웠다. 하지만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갈 수는 없었다. 싱크대가 들어오고 나면 타일을 수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3일 후에 싱크대가 들어올 예정이라고 해서 남편과 상의해본다며 결정을 뒤로 미뤘다.
현장을 살펴본 남편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반응이었다. 우리의 입장은 확실했지만 현재 붙인 타일을 떼면 벽이 더 울퉁불퉁해진다는 업체의 의견도 일리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일지 고민됐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고 다음날 저녁, 실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나 싶어 현장에 나와봤는데 본인도 너무 놀라울 정도로 엉망이었다며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얹혔던 고민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업체는 현재 상황에서 가능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현재 타일 위에 크기가 큰 타일을 덧붙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업체에서만 나온다는 스틸 패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처음 주방 벽재질을 고를 때도 타일과 스틸 패널 중에 어떤 것으로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주방 타일 사이의 줄눈도 빨간 양념에 취약하긴 마찬가지이고 바지런한 살림꾼은 애초에 포기한 터라 관리가 쉬운 스틸 패널로 마음이 기울었었다. 그런데 진한 회색은 주방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었고 스틸 재질의 차가운 느낌도 마음에 걸려서 타일로 최종 결정했다. 수많은 타일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도 꽤나 어려웠는데 깔끔하지 못한 마무리 때문에 그 선택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딱히 마음에 드는 다른 타일이 없는 것도 난감했다.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 처음 결정했던 스틸 패널로 모험을 걸어볼까 싶었다. 일이 이렇게 되려고 어그러졌나 싶은 생각 끝에 뭔가에 이끌리듯 스틸 패널로 변경했다.
결과는? 대만족.
크림색 싱크대와 어우러진 은은한 진회색은 의외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사방으로 튄 빨간 양념과 삼겹살 기름도 행주로 쓱 닦으면 처음과 똑같은 상태가 되는 데다 자석도 탁탁 붙는 스틸 재질이라 레시피를 꽂아 놓기도 세상 편해서 ‘요알못’인 나에겐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따로 없는 후회 없는 결정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사를 마치고 이사 후 몇 달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떤 공사든 100% 만족은 불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시공 전문가가 최선을 기울여도 변수는 생기게 마련이고 머릿속의 생각이 현실로 구현됐을 때는 반드시 오차라는 게 발생하니 말이다. 나조차도 스스로 못마땅할 때가 많아서 죽었다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남이 하는 일은 오죽하겠는가. 그 과정에서 얻은 또 하나의 깨달음은 고민의 시간과 결과의 만족이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고민은 필수지만 긴 고민이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여러 번 두드린 돌다리가 정작 건널 때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고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마지못한 결정이 가장 좋은 쪽으로 이끌기도 하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그러니 때로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저질러 보자. 그 끝에 설사 후회가 남더라도 미련은 남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