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내 것이 되었지만

시시콜콜한 나의 이사 이야기 - 11 D - 110

by 정희

D - 110





2019년 1월 25일 금요일, 2007년부터 이어온 수업의 마지막 발자국을 찍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특별한 감회를 기대했지만, 아직 실감 나지 않아선지 두 달 동안 준비했던 마무리는 별스럽지 않게 끝났다.


여유로운 주말을 보내고 백수가 되어 맞이한 월요일 아침. 그제야 일상의 변화가 실감 나게 다가왔다. 가장 큰 변화는 꼭 해야 할 일이 없다는 ‘홀가분함’이었다. 교사회의, 수업 준비, 필독서 분석, 상담이라는 ‘must’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좋았다. 단순히 시간을 좀 더 확보한 것 이상의 낯선 공백이었다.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나 의도치 않게 ‘워라밸’을 맞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비록 ‘워크’의 비중이 완전히 줄어든 결과였지만 수고한 나에게 주는 평온한 시간을 누려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살림에 조금 더 신경 쓸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반가웠다. ‘사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또 괜찮게 하잖아’라는 근본 없는 건방짐을 잠시 누리기도.


하지만 살림에 쓰는 근육도 따로 있는 것일까? 현실 속의 나는 소파와 하나가 되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매일 오후부터 밤까지 이어지던 수업이 정리되면 남는 에너지로 하고픈 것이 많았다.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에게 따뜻하고 소박한 아침상을 차려주고 집안을 말끔히 치운 뒤, 여유롭게 장을 보러 가는 평온한 일상. 그 길에 분위기 좋은 카페라도 발견하면 나를 위해 커피 한 잔 대접할 수 있는 여유를 꿈꿨다. 엄마와 아내로서 부족했던 역할의 빈틈을 채워나가고 시간의 여유와 공간을 나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드디어 그럴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도 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가족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 나가면 아무 생각 없이 나 홀로 멍하니 누워 TV 채널을 돌렸다. 채널을 몇 바퀴 돌리고 나면 점심 나절이 훅 지나 있었다. 점심을 걸렀지만 배고프지 않았다. 그러다가 따스하게 들어오는 햇볕을 이불 삼아 까무룩 낮잠에라도 빠졌다가 깨면 어느새 가족들이 돌아오는 저녁이었다.


짐 정리에 막바지 인테리어 공사로 처리할 일은 쌓였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의미 없이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지인을 만나는 것은 물론이고, 약속을 잡으려는 노력도, 만남을 위해 뭐라도 찍어 바르는 시간도 귀찮기만 했다.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참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들인데 내가 왜 이러나 싶었다. 하지만 내색할 수도 없는 나만의 감정이었다.


공사 현장은 멀다는 핑계를 대며 자주 들여다보지 않았다. 집 밖을 나서는 것 자체가 부담돼서 꼭 필요한 공사 일정만 간신히 챙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멍하게 지내는 내가 보였다. 텅 빈 마음에 무엇 하나 온전히 담지 못했고 간신히 깃든 생각과 계획들은 공허함에 밀려 금세 사라졌다. 낯선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음도 계절도 겨울의 한 복판을 차갑게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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