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킨 실타래

시시콜콜한 나의 이사 이야기 - 13 D - 90

by 정희

D - 90




무력감에 시달리며 지내는 날이 많아질수록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졌고 나는 더 시들어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우울감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나를 둘러싼 현실을 들여다보니 건강하게 자라준 두 아이와 성실한 남편이 있었다. 따스한 보금자리와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부모님들이 계셨고 마음 나눌 동료와 벗도 든든했다. 부족한 것도, 남부러울 것도 없는 평범하고 감사한 삶이었다.


그런데도 삶에 기쁨이 깃들지 않았다. 난데없이 화가 불쑥 치밀어 올랐고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자꾸만 늘어가는 화의 원인을 직면하고 그 마음의 뿌리가 무엇인지 바닥부터 살펴봐야 했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더 이상 나를 침범하고 갉아먹게 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상황에 떠밀리 듯 이사를 결정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일을 놓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다. 그 감정은 누군가를 탓하고 싶게 만들면서 이사에 대한 동의를 계속 방해했다.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무력감까지 더해져 피해의식은 커져만 갔다.


남편은 내가 일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경제적인 보탬이 되기보다는 아이들을 돌보고 아내로서의 역할에 에너지를 좀 더 쏟길 바랐다. 남편의 그 생각과 오랫동안 싸우며 커리어를 이어갔다. 나에게 ‘일’은 누구의 엄마, 아내, 딸, 며느리로 살아가는 것에서 벗어나 나 자신으로 살게 하는 통로였다.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는 오기에 가까운 생각은 일에 더욱 매진하게 했다.


나도 가족의 평온한 일상과 쉼을 방해하는 상황이 편치 않았지만 일을 통해 얻은 성취감과 경제적인 보탬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가족을 돌보는 일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지만 나의 영역을 포기한 채 가족과 아이에게만 집중하는 삶은 집착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했다.


가족을 돌보는 역할과 내 일을 통한 성취라는 시소의 균형을 맞추려 부단히 애썼다. 지금은 불편하고 아쉬운 상황이 생기더라도 나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건 아이들에게 또 다른 가르침이 될 거라 믿었다. 나름의 합리화 뒤에 숨어 가족의 희생과 배려를 먹어가며 성장한 셈이었지만 그렇게 견디는 사이,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자랐고 나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 갔다. 이제는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껏 일을 늘려가도 될 시점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이사라는 변수가 내 인생의 경로를 흔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 일은 존중받지 못했다. 나의 경력단절은 당연한 것이었고 일을 그만두는 것은 그동안 고단했을 나를 위한 쉼 정도로 해석됐다. 그 상황이 불편하고 속상했다. 남편이 이사를 주도할수록 내 일에 대한 방해처럼 느껴졌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내 시간과 일정이 함부로 침범당할까 봐 발톱을 한껏 드러내고 지냈다. 그러다 식구들이 각자의 자리로 빠져나가고 혼자 남으면 무용(無用) 한 시간 속의 내가 쓸모없게 느껴졌다.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도 된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꺾어버리는 또 다른 요인은 어정쩡한 내 나이였다. 어느 틈에 나이를 그렇게나 먹었는지, 40대 후반에 들어선 나이는 새로운 시도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나를 어필할 필요가 없는 백그라운드를 뒤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현실이 막막하기만 했다. 자꾸 숨고 싶었고 그때마다 점점 초라해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나의 마음을 털어놓아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어렵게 사회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지인들에겐 배부른 투정으로 비쳤다. 당장의 쉼이 절실한 그들에게 나의 불안함은 가진 자의 허영처럼 치부됐다. 남편의 존중과 격려가 간절했지만 이미 바닥난 내 마음은 이따금 부어주는 조리개물 같은 빈말로는 턱도 없을 만큼 말라있었다.


변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뿐임을 잘 알지만 마음 하나 돌리기는 얼마나 힘든 일인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나만의 동굴로 숨어들어 잡히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일상의 공백을 ‘나를 위한 책 읽기’로 채웠다. 그러다 강상중 교수의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을 만났다.


“먼저 ‘일이란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습니다. ‘당신을 이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합니다’라는 증서. 혹은 ‘여기를 출입해도 좋아요’라는 프리패스와도 같은 것이라 할까요. (중략) 사람은 사회에서 자기 자리와 역할 이외에도 일을 통해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다움’의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먼저 사회에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고자 합니다. 자리가 완성되면 이제는 거기에 있는 모두와 동일하지 않은 나, 자기만의 개성과 장점을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자 ‘나다움’을 표현하는 것. 이 둘은 마치 세트처럼 사람이 일을 구하는 이유가 됩니다.” -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강상중 지음, p40.


‘일은 사회에 들어가는 입장권이자 나다움의 표현’이라는 저자의 글을 읽은 순간, 머릿속에 엉킨 실타래가 풀리면서 모든 감정이 보다 명확해졌다. 끝없이 가라앉은 마음의 이유는 입장권을 빼앗긴 상실감이었다. 그 감정은 갈수록 몸집을 키워갔고 일과 관련된 그간의 불만까지 보태지면서 남편에 대한 원망만 키우고 있었다. 내 눈을 가리는 잘못된 생각은 걷어낼 생각도 않고 앞뒤 없이 들어선 그 생각에 마냥 휘둘렸다. 입장권이란 언제든 다시 발행이 가능하고 또 다른 기회를 부여 받은 것임을 놓친 채 주도권을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있었다.


굴절됐던 생각을 똑바로 펴자 바닥을 치던 자신감이 희미하게 쌓여갔다. 나다움을 되새기며 거저 주어진 감사의 조건을 다시 짚어봤다. 조금은 맑아진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니 노력하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혹여라도 내 마음이 상할까 봐 조심하는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엉킨 실타래의 끄트머리가 어렵사리 손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제 풀어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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