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힐러리 스웽크의 빼어난 연기, 그들이 나눈 깊은 정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둘은 복서 지망생과 트레이너로 만난다. (스포 있음) 30살이란 늦은 나이 때문에 트레이닝을 거절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프랭키)는 힐러리 스웽크(매기)의 끈질긴 근성을 보고 결국 코치가 되어주기로 한다. 힘겨운 훈련 속에서도 꿈을 향한 삶에 기뻐하는 매기를 보며 강퍅한 마음을 풀기 시작한 프랭키. 둘은 각자의 가족에게서 느끼지 못한 부녀의 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의지한다. 긴 훈련 끝에 매기는 챔피언 쟁탈전까지 오르지만 상대 선수의 반칙으로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다. 매기는 목아래를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설상가상 다리를 절단하게 되고 혀를 깨물며 자살을 시도한다. 프랭키는 결국 삶을 놓겠다는 매기의 간절한 호소를 들어주고 어두운 병실 복도를 걸어가며 영화는 끝난다.
몇 년 전 이 영화를 볼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선택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내가 매기였어도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고, 프랭키였으면 더 오래 고민했겠지만 매기를 돕는 쪽이 그녀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프랭키는 매기를 나의 사랑하는 혈육이라는 뜻이 담긴 ‘모쿠슈라’라고 부르며 아꼈다. 매기 역시 같은 마음이었지만 복싱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남은 삶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프랭키가 매기의 남은 삶을 없애주는 마지막 장면이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라 마음대로 해석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속 ‘잘못된 삶’을 보며 그때 너무 쉽게 동조해버린 내가 생각났다. 생명과 일상의 불편과 고통을 같은 저울에 올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온몸을 움직일 수 없는 고통,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단하는 절망,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맞이한 사람에게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말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아닌 타인 앞에 놓인 고통과 모욕일 때 ‘그럼에도’ 생을 지켜야 한다는 지극히 마땅한 말은 너무 쉬운 위로가 아닌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이 영화에 대한 평가 중에 ‘가치 있는 죽음’을 선택했다는 글을 보았다. 그때는 별다른 생각 없이 읽어낸 ‘가치’에 대한 해석이 이 책을 읽고난 뒤 ‘품격’, ‘존엄’ ‘수용’ 등과 함께 다르게 다가왔다.
너무나 섬세하고 예민한 작가의 문장을 보며 이런 문장과 시선이 나오기까지 작가의 마음에 남은 생채기는 얼마나 될지 헤아려본다. 떠올리기만 했는데도 자세히 알 수 없는 그 순간들이 문장을 따라 나를 관통한다. 끊임없는 질문의 도돌이표 속에 나를 세우고 쉴 새 없이 뼈를 때리며 마땅하다 생각한 것을 뒤흔들었다.
그 혼란 속에 ‘계단 세 칸’이 남았다. 세상 앞에 선 장애인들을 막아 세우는 허들. 생각이 그곳으로 모아지자 관련된 기사와 피드가 아는 만큼 보이기 시작했다. 22살의 나이에 큰 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를 입게 된 회계사 장지혜 씨, 그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학교에 간 첫날, 식당 앞 계단에 멈춰 선 지혜 씨를 보고 친구들이 말했다. “야, 들어.” 순간 장지혜 씨는 하늘을 날았고 ‘예전과 다른 나도 구성원으로 함께 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엊그제는 아끼는 동네서점 사장님이 가게 문턱에 경사대를 설치했다는 피드를 올렸다. 구청에서 불법이라고 했지만 휠체어 때문에 발걸음을 돌린 어떤 분이 잊히지 않아서 고민 끝에 설치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경사대’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기부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렇게 멋진 분들이 많았구나. 내가 그 멋진 분이 될 순 없었을까.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을 기사와 반가운 소식에 내가 할 수 있는 뭔가를 자꾸 찾게 된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의식적인 모른 척이든,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시간과 노력이든, 장애인들 앞에 놓인 계단의 높이를 줄여갈 거라 믿는다.
미약하고 한없이 부족하지만,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것. 머뭇거리는 누군가를 위해 “야, 들어.” 하며 행동하고 소수를 위해 누군가를 설득하며 남모르게 그들을 돕는 손길이 되는 것. 그것은 장애인이나 사회의 소수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적극적 행동이라는 것. 작가가 우리에게 건넨 많은 이야기 중 하나를 겨우 알아차린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