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용감하기를

<A가 X에게>를 읽고

by 정희





아이다가 사비에르에게 보낸 편지 뭉치에서 태어난 소설.

존 버거는 그 편지 뭉치를 정말 발견한 것인지 묻는 독자에게 답을 하는 대신 문학의 집으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입구를 안내한다. 그중 많은 것들이 드나드는 뒷문을 언급하며 그 문을 통해 아이다와 사비에르, 그리고 작가 자신이 서로에게 말을 건넸다면서 73호 감방 벽 수납칸에서 발견한 편지 다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테러리스트 조직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이중 종신형(종신형이 두 차례 집행되는 형벌로 살아서 풀려날 가망성이 희박한 형벌)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인 사비에르.

약제사인 그의 연인 아이다는 끝을 알 수 없는 수감생활 중인 그에게 편지를 보내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함께 나눈다.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면회도 금지된 상황이지만 매일 밤 서로의 작은 뼈마디 하나하나를 맞춰보며 상대를 그려보는 아이다와 사비에르. 그들은 수많은 밤을 보내며 ‘부재’는 ‘무’가 아님을, 영원한 것의 반대말은 덧없음이 아니라 잊히는 망각임을,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리움 속에서 깨달아간다.


시간 속에 잊힐까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하는 둘을 보며 진정한 사랑과 영혼의 만남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역경을 이겨내겠다는 불굴의 의지, 기어이 그를 지켜내겠다는 의미심장한 각오 같은 대단한 약속은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약국에서 만난 이웃과 소년 병사의 이야기를 나누고 쿠키를 먹으면서도 그를 입 속에 담아 두는 것 같은 작은 순간이 그들을 견디게 한다. 아이다의 말처럼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며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 비누 네 개가 전해지길 바라며 비누 열두 개를 보내는 마음이나 둘의 첫 비행과 사비에르의 손목에 있는 흉터까지 기억하고 사랑하는 아이다의 섬세한 애정을 보며 만다의 예언처럼 결국 만나게 된 그들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다 사비에르가 아이다의 편지 뒷면에 남긴 마지막 그림을 보고 나면 둘의 조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읽은 존 버거의 작품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문장과 치밀하게 짜인 세계관에 매료됐다. 개별성에 담긴 삶의 존중을 언급한 옮긴이의 분석도 공감되고 문학적 접근이 근사해서 작품의 여운을 그대로 이어간다. 존 버거의 다음 작품으로 무엇을 읽을지 사뭇 기대되면서도 이 작품의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문장에 다시 빠져보고도 싶다.



이제 다림질을 마쳤어요.
당신의 셔츠요. 다림질을 천천히 했어요.
몇 년 만에 당신의 셔츠를 다려 본 걸까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 년 단위가 아니라 하루 단위로 시간을 계산한다는 거 알아요.
다림질을 천천히 마치고 단추를 끝까지 채웠어요.
단추는 짙은 슬레이트 지붕 색깔이에요.
아침이면, 침대에 누운 채, 당신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침대 맡에서, 당신은 인상을 찌푸렸다가는 단추를 세 개 푼 다음 머리 위로 셔츠를 입겠죠. 이천 하고도, 백이십육일 만이에요.
당신의 영원한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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