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 Jul 13. 2022

새로운 치트키

<그러라 그래>를 읽고




아주 오래전  책의 저자인 가수 양희은 씨의 공연(?)  적이 있다. 우리  근처 백화점 오픈 행사였나,  주년 행사였나.. 그런 이벤트 공연이었다. 그분의 청아한 음성과 아름다운 노래는 역시 대단했는데 그것만큼 기억나는  음향 조정 시간이었다. 많은 인파가 모여 그의 노래를 기다리는데도 전혀 조급해하지 않고 특유의 목소리와 말투로 악기 하나하나를 체크했다. 야외 공연장이라 다소 소란스러운 분위기였고 음향도 성에 차지 않은 듯했지만 마지막 노래가 끝날 때까지 중간중간 다시 조정하며 원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집중했다.


그런 예민함이 강한 기억으로 남은 데다 그 유명한 ‘넌 이름이 뭐니?’의 톡 쏘는 말투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전엔 비빔냉면처럼 매콤한 글을 예상했다. 그런데 읽다 보면 순하고 담백한 사람만 보인다.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감추려고 입은 딱딱한 가면을 던지자 누구보다 연약한 마음밭이 드러난다. 평양냉면처럼 쭉쭉 들이켜도 속 불편하지 않은, 뒤돌아서면 자꾸 생각나고, 유려하지 않지만 읽다 보면 마음을 툭 건드리는 글이라 그런지 발행 두 달만에 무려 12쇄를 찍었다. 가수, DJ로서의 일상과 개인적인 가족사, 시한부 선고와 남편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70년의 세월에서 얻은 통찰도 무겁거나 과하게 부풀리지 않아서 좋았다.


좋은 에세이를 읽다 보면 알아차리지 못했던 내 감정과 만날 때가 있다. 이름 붙이기 어려워 그냥 지나쳤던 그때의 기분을 정확히 표현한 글을 만나면 그 감정이 나의 예민함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지점부터 책과 저자에 대한 공감이 시작된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짜게 식은 지인이 있다. 꼬리뼈 골절로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했던 몇 달 전, 내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건 그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내가 전해 듣기론 본인도 건강 관련한 걱정과 고민이 있을 때였는데 나에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신나는 일이라도 벌어진 양 골절 사고와 관련된 나의 사연에만 관심 있어했고 내가 그의 건강을 걱정할라치면 얼른 화제의 중심을 내 사고 쪽으로 옮겼다. 다 낫거든 얼른 만나자는 그의 말에 그러자고 대답했지만 그날 이후 그는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땐 내 상황 때문에 무엇도 곱게 보이지 않을 때라서 싸한 기분도 그저 내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누군가의 불행을 구경하는 마음 정도는 구별 가능한 부분이라 내심 찜찜했던 게 사실이다. 그날 말갛게 들킨 그의 뒷모습이 그간 우리가 쌓은 우정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가 찐하게 감지한 이상, 관계를 위해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상대에게 더 이상 이전 같을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게 인지상정이고 관계의 자연스러운 순서일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이 떠오를 때면 참으로 쓸쓸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마음 한 구석에 미뤄둔 찜찜하고 컬컬한 상황을 보면 양희은 작가는 이렇게 외치겠지. “그러라 그래.” 언뜻 상대의 무심함을 탓하거나 어그러진 관계를 내버려두겠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의 한계를 이해하고 억지로 붙잡아놓지 않는 순응의 다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내 맘 같지 않은 수많은 상황에 쓸만한 치트키 하나가 더 생겼다.

 

#고전적치트키#그러게요#그러니까요

#새로운치트키추가#그러라그래



문병 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말갛게  마음이 들여다보이는  같았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입장이 아닌  다행스러워 안심하듯  위로했다. 나를 보며 눈물까지 흘렸지만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어떤 사람은 나의   시한부 소식에 자기 건강 챙기러 산부인과에 예약하고  검사를 받기도 했다.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알았다. 여러 사람  쓸데없다는 것을. 결국 한두 사람이면 족한데, 허전하다고 줄줄이 얽힌 실타래처럼 많은 사람들을 가까이할 필요는 없었다. P30





작가의 이전글 책이라는 자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