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는 민들레'를 읽고
작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인근 초등학교에서 그림책 수업을 진행 중이다. 이번 학기에 만난 친구들은 초등학교 2학년으로 성별, 독서이력, 학습 정도, 가정환경 등의 정보를 전혀 모른 채 그야말로 백지상태에서 만났다. 방과 후 특기적성 수업 중에 하나지만 내가 담당한 수업에 오는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이 교육복지 대상자 아이들이다. 저마다 사연이 있는 가정의 아이들이었고 여러 이유로 담임 선생님의 추천(?)을 받은 아이들이었다. 아무 정보 없이 아이들을 만난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불필요한 선입견이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고 아이 한 명 한 명을 내가 만나고 느끼고 싶어서 처음부터 그래 왔다.
아이들과 처음 만나던 날, 이번에도 담당 선생님은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아이들을 교실에 남겨두고 나갔다. 아이들은 누가 들어왔는지 나가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교실 곳곳에서 무협지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래도 선생님 같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는지 한 두 명이 자리에 앉기 시작했지만 결국 아이들을 모두 의자에 앉히고 수업을 시작하기까지 수업시간에 절반을 써야 했다. 이후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수업을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6주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의자에 미리 앉아서 내가 등장하는 문 쪽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이쯤 얘기하면 대부분은 교사인 내게 특별한 능력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영혼 없는 칭찬을 하거나 무턱대고 비결을 묻곤 한다. 그때마다 난 어색한 미소를 짓거나 집요한 질문엔 손사래로 분명한 부정을 표현하곤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 특별한 비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눈을 맞추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조용히 눈을 바라보며 둘만 있는 것처럼 잠시라도 한 명 한 명의 아이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8명이 동시에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통에 가여운 내 동공이 허공을 헤맨 적도 있었지만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던 건 분명하다. 온전히 자기에게 집중하는 눈동자 앞에서 아이들은 묻지도 않은 많은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때론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마음 아픈 일을 겪은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툭 이야기를 던지는 바람에 듣는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댈 때도 있었다.
아이들과의 수업이 조금이나마 수업다워진 날, ‘민들레는 민들레’라는 그림책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있어도 민들레는 민들레인 것처럼 우리 고유의 존재와 소중함은 변치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우린 모두 꽃’이라는 그럴듯한 메시지를 전하면 아이들의 자존감도 높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에 취했다.
하지만 그 날 아이들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자기들은 절대 꽃이 될 수 없다는 듯 그들이 겪은 폭력을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좋은 얘기 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는 회복되기 힘든 일상의 아픔들이 너무 진했다. 내가 아무리 어여쁜 그림책으로 그들의 삶을 화사하게 색칠한다 해도 금세 어둡게 물들어버릴 일상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담담하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 작은 가슴으로 이해하고 품어가고 있었다. 까르르 웃으며 털어내고 있었다.
그 일상을 살아내는 아이들이 너무 대견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본능적으로 환한 빛을 따라가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 꽃처럼 화사하지 않아도 살아낼 가치가 있음을 아는 아이들이 나보다 대단한 존재 같았다. 이런 아이들에게 삶의 긍정을 가르치고 대단한 훈계인 양 전하고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아이들은 내가 가르쳐 주기도 전에, 이미 꽃으로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