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는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게 되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재혼했다. 그 바람에 나의 어린 아빠는 이호현에서 김호현이 되었고 의붓아버지에게 눈칫밥을 먹어가며 줄줄이 태어나는 이복동생을 업어 키워야 했다. 쉬어빠진 찬밥이 돼버린 나의 아빠는 할머니에 대한 원망을 먹으며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아빠가 꾸려낸 우리 가족은 유일하게 허락된 보금자리와 같았다. 그 누구보다 사랑을 쏟았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아버지의 역할을 본 적 없을뿐더러 싱거운 사랑 한 번 받아본 적 없던 아빠는 사랑을 주는 방법도 몰랐다. 더구나 가장 사랑했던 3대 독자 아들에 대해선 더욱 서툴렀다. 제대로 된 훈육도 익숙지 않은 건 마찬가지여서 말로는 가르침을 앞세웠지만 결국은 아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기 일쑤였다. 결국 아빠는 탐탁지 않은 아들과 갈등의 쳇바퀴에 올랐고 아들의 커갈수록, 아들의 사정이 나빠질수록 빠르게 돌아가는 쳇바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좀처럼 잠 못 들던 밤에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 하나가 나를 괴롭혔다.
‘나도 아빠를 그리워하는 날이 오게 될까?’
그것은 아빠의 부재가 아직 멀었다는 확신이면서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아빠를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체념이었다. 확신과 체념 사이를 오갔던 그 날은 엄마의 칠십 번째 생일이었다. 일 년 전, 아빠의 칠순을 오빠에게 맡겼다가 어설프게 보낸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나는 부모님 동반 기념 여행을 보내드렸다. 그걸로 딸 노릇 했다고 생각했는지 친척들과 식사하는 자리 정도는 오빠가 준비할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사업 밑천 필요할 땐 하루가 멀다 하고 부모님을 찾던 오빠는 엄마 생신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 친정 오빠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마뜩찮은 마음만 가득했다. 내색은 못해도 서운하실 부모님 마음이 안쓰러워서 결국 우리 부부가 서둘러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친정 오빠에 대한 못마땅함이 부풀대로 부풀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을 봐서 그러려니 넘겨야겠다고 다짐하며 자리에 참석한 그 날, 다잡은 나의 마음은 아빠의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졌다.
“좀 이따 오빠 보면 쌀쌀맞게 굴지 말고 좀 따뜻하게 대해 줘. 요즘 힘든 모양이야.”
친정 경조사마다 전면에 나서야 하는 내 마음과 입장은 전혀 헤아리지 않는 말이었다. 오로지 아들 편에서만 생각하고 배려하는 아빠의 속마음을 눈과 귀로 확인하고 나니 버텼던 마음에 쩍쩍 금이 가는 것 같았다. 서운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깊은 슬픔이 밀려들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음’으로 불편한 감정을 감추려 애썼다.
“응? 정희야. 알았지?”
아빠가 대답을 요구할수록 속상함과 미움이 커졌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그 마음을 꾹꾹 누르며 엄마의 칠순 모임을 무사히 마쳤다. 그날부터 나는 친정으로 가는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러니 그 밤의 느닷없는 생각이 또렷이 남을 수밖에.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눈치 챈 아빠가 계속 전화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아빠와 통화할 자신이 없어서 받지 않았다. 아빠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늘어갈수록 미안함보다는 오기에 가까운 감정이 올라왔다.
‘나도 힘들다고요. 왜 나는 늘 뒷전이에요? 오빠가 자기 하고 싶은 데로 막 살 때, 저만큼은 아빠 근심시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이번엔 저도 마음대로 할 거예요’ 같은 철없는 혼잣말로 몇 주를 보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4월의 어느 목요일, 엄마에게서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아빠 응급실에 입원했어.’
입원이라니, 더구나 응급실이라니? 집 나갔던 정신이 확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한달음에 달려간 병원에는 환자복을 입은 아빠가 누워있었고, 소변 줄 끝에 매달린 주머니에는 뻘건 혈뇨가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입원은 그간의 서먹함과 서운함을 몰아낸 태풍과 같았지만 그 자리를 메울 또 다른 폭풍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간의 검사와 기다림 후에 아빠는 그 이름도 생소한 ‘육종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자갈 같은 암 덩어리들이 복부 장기 위에 촘촘히 뿌려진 CT 결과를 보여주었다. 수술은 늦었다며 항암치료를 권했다. 완치는 어렵다는 말이었다. 엄마는 6인 병동이라는 것도 잊은 채 아빠를 끌어안고 불쌍하다며 울부짖었다. 아빠는 엄마를 다독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이랑 결혼해서 이렇게 착한 아들, 딸에 손자 손녀까지…… 나는 행복하고 후회 없이 살았어.” 사위에게는 악수를 청하시며 “고마워. 엄마랑 우리 딸 잘 부탁해. 난 천국에 먼저 가 있을게.”라는 드라마 대사 같은 말까지 했다.
의연한 아빠의 마음과 달리 몸은 암세포에게 계속 지고 있었다. 혈관이 눌려 터진 탓에 혈뇨가 멈추지 않았고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은 모두 빠졌다. 걷잡을 수 없게 오른 혈당은 조절이 불가능해졌고 왼쪽 팔과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지만 이유를 찾지 못했다. 몇 번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항암치료를 진행했지만 암 덩어리는 좀처럼 작아지거나 수가 줄어들지도 않았다. 장 기능 마비로 배변활동을 하지 못해서 임산부처럼 배가 부풀어 오르자 대장을 바깥으로 노출시키는 인공항문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그렇게 7개월을 꼬박 아프기만 했던 아빠는 말기 암의 고통을 덜어줄 진통제에 취한 채 우리 곁을 떠났다.
아빠가 그리울 리 없을거라는 난데없는 생각에 괴로웠던 그 밤도 벌써 4년 전 일이 되었다. 아빠를 떠올리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으리라곤 감히 상상도 못했던 날이 벌써 천 일을 훌쩍 넘었다. 그 밤 스쳐갔던 생각은 아빠에게 다가올 아픈 결말에 대한 예감이었을까? 후회하지 말라는 경고였을까? 아빠의 마지막 비상등을 무시한 채 달려버린 못난 딸의 질주는 아니었을까.
늘 그 자리에 있어서 보고 싶어 해 본 적 없던 나의 아빠. 존재를 지우고 나서야 비로소 존재하게 된 나의 아빠. 나를 에워싼 공기와 한숨이 선명했던 그 밤, 끝없이 이어질 그리움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