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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Sep 07. 2022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눈

다른 감각을 벼리는 나이




나이 들었다는 걸 실감할 때가 종종 있다. 예전엔 ‘이따금’이었던 것이 이젠 ‘꽤, 자주’ 생겨서 ‘종종’이라는 간격이 딱 맞다. 실감의 빈도뿐만 아니라 분야도 점점 넓어지고 있는데 그중 요 며칠 연달아 경험했던 건, 눈물에 관한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잘 우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는 툭하면 우는 통에 엄마의 구박을 어지간히도 받았다. 그 학습효과 덕분인지 자라면서는 그저 잘 우는 편에 속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일하고 양육하면서는 눈물짓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울고 싶은 순간이야 그전보다 많으면 많았지 줄어들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정말 무너질 것 같은 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감정도 사치스러울 만큼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이다 보니 눈물 흘리며 감정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내 손으로 정리하고 해결하고 묶인 감정을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의 연속을 겪다 보니 우는 법보다 일어나 움직이는 법에 익숙해진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엔 ‘나 우는 걸 잊었나?’ 싶은 생각이 불현듯 파고든 날도 있었다. 드라마였나, 예능 프로였나(네, 저 예능 보다가도 잘 우는 사람입니다). 예전 같으면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도 남았을 장면인데 코끝이 찡해지더니 다시 스르르 풀리고 마는 게 아닌가. 엥? 이거 뭐지? 예정된 감정의 레일을 따라 눈이 뻘게지게 울 타이밍이었는데  저 혼자 달아나고 말았다. 순간 목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풍부한 감정을 질척거림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은근 자랑스러워했던 걸까? 기쁨과 슬픔에 맹숭맹숭해진 내가 나 같지 않아서 괜스레 당황스러워하는 내가 당황스러웠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속 기정은 자기 슬픔에 겨운 어느 날 버스 뒤에 앉아 이어폰을 타고 흘러드는 음악에 맞춰 맘껏 운다. 힐끔거리는 기사님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자신 안의 슬픔 감정을 눈물에 담아 쏟아낸다. 버스에서 내린 뒤 기정은 혼잣말을 한다. “아, 오랜만에 잘 울었다.” 카타르시스라고도 하는 그 후련함, 나도 그 시원함이 고팠다.     


그렇게 메말라가던 내가 요즘은 툭하면 운다. 27년간 응급실 청소 노동자로 살아온 이순덕 님의 굵은 손마디를 보거나 유치원 발표회에서 칼군무를 맞춰 주는 어린아이들을 보다가도 눈물이 나고 제자리에서 32회 푸에테 턴을 도는 발레리나를 보다가도 난데없이 눈물이 터진다.  눈앞에 보이는 장면 때문에 우는 건 아니다. 이젠 그 장면을 위해 아낌없이 바쳐진 선생님들의 노고와 발레리나의 상처투성이 발가락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걸 지도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고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까지 볼 수 있는 것. 스스로의 최선을 위해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과 열정의 가치까지 눈여겨보아주는 것. 나이는 노안으로 흐릿해진 시선 대신 다른 감각을 예민하게 벼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나이가 주는 예기치 못한 선물일지 모르겠다. 남은 삶을 좀 더 풍부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응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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