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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커피에서 올 수도 있어.

아프리카의 신선한 원두

갓 짜낸 커피 한 입


맛이 없다

 

실망한 마음보다 빠른

바리스타의 엄지손가락


줄지 않는 커피, 침묵하는 얼음


르완다 키갈리 공항의 구름이 눈앞에 있는 듯하다


타인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고 싶은 소소한 순간들이 있다. 가득 찬 생일주를 한 입에 다 마시길 기다리는 친구들, 주문한 메뉴의 통일을 원하는 식당 사장님, 집에 어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감 전 카페의 종업원 등, 그들의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고자 자신을 희생할 때도 있다. 독하고 맛없을 생일주를 한 번에 비웠다. 생선구이를 먹고 싶었지만 제육볶음으로 메뉴를 통일했다. 아직 온기가 많이 남은 레몬차를 데낄라 마시듯 한입에 털어 넣다가 혓바닥을 데고 성급히 자리를 떴다.


르완다의 커피 원두는 고급진 품질로 명성이 높다. 르완다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음식점이 아닌 카페였다. 카페 안에서는 큰 기계에서 원두를 직접 볶고 있었으며 물가에 비하면 가격도 꽤 비싼 곳이었다. 본토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큰 기대를 품고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미국의 복싱 선수를 닮은 듯한 바리스타의 날렵한 미소와 전문가로 느껴지는 손놀림에 한껏 기대가 부푼다. 아프리카의 단골 질문인 ‘북한에서 왔냐’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완성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는 진한 검은색 커피 위에 약간의 하얀 거품이 올라와 있다.


‘아아! 이것이 아프리카의 최고급 원두로 만든 커피인가!’


눈을 감고 크게 들이켰다. 마시자마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세상에나! 아메리카노에 시럽이 들어가 있다. 아메리카노가 아니고 아프리카노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음식 스무 가지를 뽑으면 18위쯤에 있을 시럽 넣은 아메리카노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바리스타를 쳐다보는데 바리스타가 이미 나를 지켜보고 있다. 자부심이 가득 찬 눈빛과 함께 그의 엄지가 치켜 올라간다. 따봉이었다. ‘내가 내린 커피는 고급원두로 만든 대단히 훌륭한 커피이며 남쪽인지 북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시아에서 온 당신은 평생 처음 맛보지 못했을 진정한 본토의 맛이다.’라는 의미를 함축시킨 엄지손가락이었다. 찌푸린 나의 인상이 그에게는 세상에 이런 훌륭한 커피가 어디 있냐며 감탄의 표정으로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용광로에 들어가는 터미네이터처럼 나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이 올라간다. 따봉의 의식이 끝나자 커피를 다 마셔야 하는 속박의 굴레가 채워진 것을 깨닫는다. 아직 반이나 남았다. 단맛보다 괴로운 것은 마신 후 혀에 남아있는 단 향의 찌꺼기였다. 당장 양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따봉의 의식을 함께 올렸기에 묵묵히 커피를 다 마시기로 결심한다. 바리스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야. 커피를 반드시 다 마셔 그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다.


때로는 삶의 고난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는 것임을 깨닫는다.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는다. 명성에 크게 기대하면 실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깨달음이 많은 것을 보아하니 설탕을 넣은 아메리카노가 어지간히 싫은가 보다.

아직 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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