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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현 Jul 14. 2019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비참함

sns를 통해 우리가 비참해지는 과정



비교의 일상적인 생활




사람에게 있어서 평등은 정말 존재하는 것 일까?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언제부터 누군가와 나를 비교했지?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비교하는 법을 배우고 이를 통해 세상을 살아간다. 

가장 처음 시작하는 사회적 공간인 학교에서부터 비교는 시작된다. 시험 성적, 싸움, 외모, 패션, 부모의 영향력 등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상대의 가치가 비교되며 강자는 위에서고 약자는 도태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다양한 요인들에 의에 어려서부터 잠재적으로 서로에게 측정받고 평가되고 있다.




비교할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비교할 자격 없는 나는 혹시나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비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며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론적으로 사람들과 무언가에 대한 비교가 아닌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배우고 극복함으로써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하지만 과연 언제부터 그랬을까?


메슬로의 욕구 단계설의 기준에 의하면 인간에겐 5가지 욕구가 존재한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 소속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매슬로의 욕구 위계 이론





나의 개인적인 뇌 피설이지만 가장 하위 욕구인 생리적 욕구가 해결을 하면서부터 사람은 비교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높은 수준의 안전을 보장받기를 원하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길 원하고, 다른 누구보다 존경받길 원하며,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멋지게 성장하길 바란다.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이전에 비해 정보 통신이 발달한 지금 사람들은 더 많은 비교의 잣대를 우리 사회에 들이밀기 시작했다. 이전엔 몰랐겠지만 SNS의 발달로 인해,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을 동시간대에 다른 공간에서 다른 누군가가 더 맛있는 것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내가 남들보다 더 멋지고 좋은 곳에 있을 때 그런 비교를 통해 우위에 있음을 느끼고, 나의 팔로워 수 혹은 구독자 수가 다른 사람을 얕잡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며, 내가 타고 있는 차와 더 좋은 차를 타는 남들을 보며 스스로를 없신 여길 때도 있기에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자존감을 스스로 낮추는 바보 같은 행동된다.



일반적으로 과거에 비해 자살률이 지금 시대에 정말 많이 올라갔다.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문제인지 아니면 남들에 비해 내가 더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인 건지 잘 모르겠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피 튀기는 한국 전쟁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기 위해 발악을 했고, 뜯어먹을 풀과 나무 쪼가리 조차 없는 전쟁 속에서 살기 힘들다며 자살한 경우가 지금 시대의 자살한 경우보다 더 많았을까?



스마트폰과 싸이월드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지금에 비해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아날로그적 시대에는 딱 내 주변의 사람들만 비교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쳐본 적 없는 사람 혹은 죽을 때까지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을 sns를 통해 비교하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깎고 바보처럼 불행을 느낀다.



우리가 이전에 비해 더 불행해진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에 더 행복했던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sns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지금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더욱더 가벼워지고 있고,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굴레가 끝없이 이어진다.




우리가 비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간단하다 비참함과 교만 혹은 오만함뿐이다.








이런 비교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외적인 꾸밈이 중요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외적인 멋과 내적인 멋이 같이 조화를 이룰 때 그 사람이 정말 멋져 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내면의 아름다움



외적인 꾸밈은 단 시간 안에 다른 사람들에게 굉장히 많은 것들을 어필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편법이지만 이 편법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의 폭도 굉장히 크다.  그렇다면 내적인 멋은 어떻게 완성되는 것일까?


내적인 멋은 편법이 아닌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매우 정통적인 방법의 멋인 것 같다. 단 시간에 채우기 힘든 지적 수준과 근래 유행하는 단어 '뇌섹남'이란 단어를 보면 요즘 사회에서도 외적인 멋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내적인 멋을 갈망하는 사람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늙기 싫어하고 멋지고 아름다움을 평생 유지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비교우위를 통한 멋이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 서기 위한 나만의 멋을 찾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프레임을 완성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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